환절기 옷정리

나를 사랑하는 시간

by 해넘이

나는 물건을 잘 버리지 못한다. 물건을 사는 것도 몇 달을 고민하고 산다. 정리하는 것도 오래 걸린다. 물건 하나하나의 기억을 떠올리다 보면 한 세월이다. 그러나 요즘은 좀 바뀌었다. '나의 행복'이라는 새로운 기준을 더 우선시 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낡고 보풀이 일고 고무줄은 기능을 상실한, 땀 흡수도 잘 안 되는 재질의 요가바지. 어설프게 고무줄을 다시 끼우고, 화장실 갈 때마다 끌려서 젖는 불편함에 밑단을 올려 기우고 잠옷으로 입었다. 여전히 불편함에도 몇 년을 더 끌어안고 있다가 겨우 버렸다.

그 옷은 10여 년 전 아빠가 귀가하시다 길에서 보고 내 생각이 나 사 오신 바지다. 나는 넉넉지 않은 집의 둘째이자 막내다. 내게 꼭 맞는 새 옷은 사치였다. 용돈을 모아 초등학교 때 친구들과 같이 가서 산 청바지가 유년시절 마지막으로 산 나만의 옷이다. 그 후로도 가끔 언니와 돈을 모아 쇼핑을 가 각자의 옷을 샀지만 우리는 결국 옷을 나눠 입었다. 나는 물려 입는 옷이 당연했고 딱히 불만도 없었다. 언니 건 다 좋아 보여서 내가 입을 수 있게 되면 기분이 좋기까지 했다.

그래도 옷 같은 데 돈을 잘 안 쓰시는 아빠가 사 온 옷. 요가를 오래 다니는 날 생각하며 사 오신 바지는 내게 특별했다. 아빠마저 "그런 일이 있었어?" 하며 잊은 기억이지만 나는 그날의 아빠를 기억한다. 따뜻한 햇빛이, 둘만 있는 집이, 아빠의 표정이 나는 좋았나 보다. 낡은 바지는 내게 아빠의 사랑이었다.


초등학교 때 모아놓는 공기도 15년이 되어서야 겨우 버렸다. 한 알 한 알 내 손에 맞는 적당한 무게로, 공기알 두세 개를 해체해 한 알을 만들었다. 모양도 색도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모았다. 그리고 혼자 집에서 심심할 때마다 꺼내 놀았다. 집에는 같이 해줄 사람이 없어서, 초등학교 4학년 이후론 친구들도 흥미를 잃어서 나 혼자 10단까지 만들어 놀았다. 학교에서 만든 주머니 만들기를 활용해 버리는 청바지 밑단을 잘라 만든 파우치에 담겨 있는 내 20알의 공기. 서랍 속에서 1년에 한두 번 빛을 보다 15년 만에 내 곁을 떠났다. 친구들 앞에서 으스댈 수 있었던 어린 날의 장기였다.


가족들과 바닷가에 가 주운 예쁜 조개껍질도 있고, 계곡 가서 주운 빛나는 돌멩이도 있다. 초등학교 선생님께서 만들어주신 책갈피도 가지고 있다. 초중고등학교 때 쓴 일기장은 물론이고 어려서부터 끄적인 노트도 한 가득이다. 좋아했던 과목 교과서도 가지고 있다. 깨알같은 필기를 볼 때마다 괜히 뿌듯하다. 지금까지도 연락하며 지내는 고등학교 친구들이 생일마다 준 편지와 선물도 갖고 있다. 직접 그림을 그려 카드를 만들어 준 것도 있고, 직접 만든 수첩과 목걸이도 있고, 책을 선물하며 붙여준 포스트잇도 그대로다(친구야 미안. 취향 안 맞는 책은 다 읽고 기부했다.)


방정리는 핑계고 행복한 추억팔이가 목적이었나 헷갈리기도 한다. 정리는 계획한 거에 반도 못했지만 즐거운 시간이다.

가끔 자질구레한 것들을 전부 싸들고 있는 내가, 즐거운 기억도 있지만 씁쓸한 기억도 있는 물건마저 갖고 있는 게 답답해 눈 질끈 감고 버려버린 것도 있다. 파헤치고 들추어내면 저 어딘가 있을 기억이지만 물건을 버리니 잘 떠오르지 않아 잊혔다. 부정적인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됐다. 그런 것들은 참 잘 버렸다.


이사를 거듭하며 물건은 조금씩 줄었고, 다 싸들고 다닐 만큼 통장도 마음도 여유가 없는 내가 속상할 때도 있었다. 버리고 싶어 버린 게 아니니까.

그런데 드디어 독립하여 혼자를 즐기는 요즘은 더 버리고 싶다. 사실 다 갖고 있을 만한 돈과 마음의 여유가 있었다면 그렇게 애틋하게 갖고 있지 않을 것들도 많다.

저거 다 버리고 더 넓게 예쁜 공간에서 살고 싶다. 비로소 진정 나만을 위한 공간이다.


어딘가에서 물건을 잘 못 버리는 사람은 그만큼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라고 했는데, 그 넘치는 사랑을 요즘은 물건이 아닌 나 자신에게 향하도록 신경 쓰고 있다.



요즘 나의 행복이 최우선인 나는 생각한다. "너 저거 갖고 있는 거 좋아 안 좋아? 보면 행복해, 아님 생각이 많아져? 행복하면 갖고 있고, 아니면 버리고 더 좋은 거 둘 자리 만들자!"

환절기, 옷정리가 필요한 시기 또 고민한다. 아까워서 못 버리는 옷도 솔직히 있다. '내가 쓴 돈이 얼만데 몇 번 입지도 못하고-'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다시 질문한다. 저 옷을 보며 나는 행복한가? 마음이 복잡해지는가?

전자라면 갖고 있고, 후자라면 버리기로 한다.

소유와 버림으로 나는 또 행복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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