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서 보면 모두 지평선에 서 있다.
남편이 오늘 새벽에 죽었어요.
막 출근하려는데 기훈이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기훈은 중고등학교, 대학교까지 동창이다.
“네? 갑자기 왜요?”
“어젯밤에 자다가... 심장마비래요.”
"........"
잠시 침묵이 흘렀다. 침을 꿀꺽 삼켰다.
“우리가 교회나 성당에 다니지도 않았고, 아는 사람이 거의 없어요. 이런 일도 처음이고. 면목 없지만, 저 좀 도와주세요.”
“네, 그럼요.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잠시 멍하니 서있었다. 기훈은 다른 사람과 교류가 거의 없었다. 학교 동문회도 참석하지 않았고, 교회나 성당 등 종교 활동에도 전혀 관심이 없었다. 나와는 중학교부터 대학까지 동창이고, 게다가 먼 미국 땅에서 만났으니, 꽤 가까워질 만도 했지만, 어느새 만남이 끊어지고 전화 통화도 거의 없었다.
그는 위로 누나와 아래로 남동생이 있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동네에서 허름한 호프집을 하며 삼 남매를 키웠다. 그는 학교 다닐 때 전교 1등을 도맡아서 했다. 나와는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꽤 친하게 지냈다.
형편이 어려워도 가족 간 결속력은 상당했다. 그는 무조건적인 가족 편이었다. 특히, 호프집 손님 중에 어머니께 함부로 대하는 사람과는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들이덤벼 싸웠다. 나이고 뭐고 필요 없었다.
형제간 우애도 각별했다. 특히 누나에 대한 애정이 컸다. 아마,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 대신, 가장 역할을 해야 한다는 부담이 컸을 것이다. 그는 생계를 책임진 어머니 대신 집안일을 많이 했다. 남자 고등학생이 김장을 담그기까지 했다.
당시 학교 앞 라면 집에는 껄렁대는 친구들이 많이 드나들다. 라면 한 그릇 비우고, 담배 한 대 피우며 호기롭게 연기를 내뿜는 것이 멋으로 통했다. 기훈은 스스로 ‘나는 공부도, 운동도 잘하는데, 담배도 피우고, 술도 할 줄 안다.’ 꽁생원이 아니라는 묘한 자부심이었다. 일탈로 보였지만 잠재된 반항이었다. 그는 고등학생인데도, 어디서 구했는지 ‘해방 전후사의 인식’ ‘전환시대의 논리' 등의 금서를 탐독했다. 정치, 사회에 대해 날 서게 비판적이었다. 나이보다 꽤 성숙했다.
나는 그의 말에 관심이 없었다. 아버지는 늘 내게 체제에 순응하라고 말씀했다. 집안의 기둥이었던 큰아버지가 학도병으로 전사한 사건이 아버지 인생에 깊은 상처로 남았기 때문이다.
그는 대학에 들어가 대학신문 기자로 이름을 날렸다. 그가 쓴 기사는 학생들 사이에 반향이 컸다. 나중에 대학 신문사 주필까지 했다.
학생운동이 극심하던 80년대 초는 시대와 이념이 교체되는 혼돈의 시대였다. 나는 이런 혼란을 잠시 피하려고 입학한 다음 해 현역으로 입대했다.
그는 호적상 3대 독자라 6개월만 복무하면 됐는데, 어떻게든 안 가려고 했다.
입대 후 서로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겼고, 내가 복학하자 그는 졸업 후 스포츠지 기자로 있다고 들었다. 그 자리가 만족스럽지 않았을 것이다.
한참 연락 없이 지내다, 5년 전 LA 지역 스포츠지 창간 행사에서 우연히 그를 만났다. 군 입대 이후 처음이니 거의 25년 만이었다.
“어, 기훈이? 여기 웬일이야?”
“나 최근에 발령받았어. 인터넷 T/F 팀을 만드는 중이야.”
겉모습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어딘지 가식적이면서 우쭐대는 말투는 여전했다. 서로 오랫동안 교류가 없다 보니, 그리 반갑지도 않았다.
“어디 사는지 알았으니, 시간 나면 보자.”
이렇게 형식적인 인사만 나누고 헤어졌다.
어머니가 오셨을 때, 기훈이 만났던 이야기를 꺼냈다. 고등학교 시절, 자주 놀러 왔던 친구였기에 어머니도 이름을 기억하고 계셨다.
“그래? 서로 의지할 수 있어서 참 잘됐네. 한번 오라고 하지?”
어머니의 관심은 오직, 그가 내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바로 전화 걸었다.
“어머니가 오셨어. 너를 보고 싶어 하시는데, 이번 토요일에 가족들이랑 한번 보자.”
어머니도 옛날이야기를 나누며 기분 전환도 하실 겸, 나 또한 인연의 끈을 계속 이어가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 주 토요일, 기훈이 가족과 함께 집에 왔다.
아내는 그보다 한 살 연상이었고, 아들 둘은 연년생이었다. 그는 나보다 어머니와 훨씬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어머니는 반가워하셨고, 그도 매우 즐거워 보였다. 이상하게, 나와는 조금 어색한 분위기였다. 왜 그랬을까?
그는 학창 시절 잘 나가던 모습을 보이고 싶었을까?
스스로 쌓은 벽 안에 갇혀 있었다.
기훈이 어머니가 미국 오셨을 때, 우리 가족이 그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버뱅크의 작은 2 베드룸 아파트. 어머니는 여전히 억센 경상도 사투리를 쓰셨다. 40대 중반에 처음 뵙고, 어느덧 30년이 흘러 완연한 노인이 되셨지만, 총기는 예전 그대로였다.
“느그 참 오랜만이네. 그동안 잘 있었제? 사느라 너무 애쓰지 말 그레이. 애쓴다고 다 되는기 아닌기라.”
30대 초반에 남편을 잃고 안 해본 일 없이 삼 남매를 키운 노인의 입에서 나온 첫마디는 바로
'너무 애쓰지 말라'는 것이었다. 살아보니, 아무리 애써도 안 되는 건 안 되더라는 것. 그러니 너무 노심초사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런 것을 미리 알고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
장례식 때, 나는 부의금 접수와 사회를 맡았다.
장례식에 앞서, 한국에 있는 대학 신문사와 과 학번 동기회장에게 연락해 화환을 부탁했고, LA 지역 동문회에도 연락을 돌렸다. 마지막 길이 너무 초라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장례식장에 그와 관계된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한국서도 아무도 올 수 없어, 유튜브로 중계했다. 나는 사회를 보며 조문객들에게 그와의 추억을 말했다.
'한국에서 이를 지켜보는 노모의 심정은 어떨까?'
참척...
장례식 마지막 순서, 아들이 편집한 영상을 내보내려는데 기기가 작동하지 않았다.
아무리 해도 화면이 뜨지 않았다. 조문객들은 조용히 기다렸고, 참다못한 그의 아내가 마이크를 들었다. 울음을 가까스로 참으며 말을 토해냈다. 목소리에 억울함이 섞여 있었다.
“우리 인생이 끝까지 안 풀리네요. 마지막 가는 길에 이런 것까지 방해를 하다니요.
부디 저 세상에서는 편히 지내기를 바랍니다.”
‘이 자리에서 이런 말을... 한국에서도 보고 있는데.’
나도, 조문객도 당황해하며 서로 얼굴을 돌아보았다.
순간, 그동안 품었던 기훈에 대한 의문이 조금 풀렸다.
스스로 만족할 수 없었다.
하고 싶고, 이루고 싶은 일들 -
현실의 벽에 막혀 좌절될 때,
인정하고 수용하기보다,
자기를 학대하며 숨는 것이,
책임을 다하는 것?
자기 합리화일 따름이다.
갑자기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화면 위로 기훈이 가족과 함께했던 순간들이 조용히 떠올랐다. 그가 활짝 웃고 있었다.
그의 아내가 마지막 한 말이 머리에 맴돌았다.
‘무엇이 그의 인생이 그렇게 안 풀렸다고 한스러워했을까? 그들에게 잘 풀리는 인생은 어떤 모습일까?’
아니, 이건 또 뭐야?
아침에 페이스북을 열어보니 후배가 남편 얼굴과 함께 R.I.P. (rest in Peace)라고 올렸다. 아래로 내려보니, 오늘 새벽에 영면했다는 것이다.
불과 몇 달 전, 그의 아버지 장례식장에서 “선배님, 바쁘신데 와주셔서 감사해요.” 아무 일없이 인사를 나누었는데, 갑자기 세상을 떴다. 나이도 나보다 열 살이나 어렸다. 이제 내게도 죽음이 멀리 있는 남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는 꽤 촉망받는 가수였다. 대학생 때, 유명 가요제에 입상했고, 작사 작곡에도 유능했다. 어느 날, 조울증을 고백하고, 자신의 상태를 정직하게 알리는 유튜브를 제작해서 병의 심각성을 알렸다. 그리고 비영리 단체를 설립해 우울증, 자살 방지 운동에도 적극적이었다. 그의 활동이 서서히 알려질 무렵, 갑작스러운 사망 소식이 들려왔다.
며칠 전에는 인 목사님이 끝내 암으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보다 두 살 많다. 한 동네 살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목회를 더 잘해보려고, 뒤늦게 유학 와서 제대로 꿈도 펼치지 못하고 허망하게 돌아가셨다. 장례식장에 가보니, 대학생 딸과 아들 남매가 그리 슬퍼하지 않아 놀랬다. 아빠가 말기 암으로 본인과 가족이 고생이 심했다고 들었는데, 막상 돌아가시니 홀가분했나 보다.
조문객도 거의 없는 초라한 장례식이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베이커리에 들러 아이들이 좋아하는 케이크를 샀다.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다.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케이크를 기다리고 있을까? 지금이야 케이크겠지, 크면 케이크를 사다 준 나를 기억할거야. 그래, 이걸로 충분해’
아버지도 야간 근무를 하시며, 회사에서 간식으로 나눠준 단팥빵을 안 드시고, 늘 갖다 주셨다.
50년도 더 된 일이다.
지금 내 마음에 남아있는 것
아버지의 존재.
내 어머니도 기훈 어머니와 같은 말씀을 하셨다.
“사느라 너무 애쓰지 마라. 살아 보니, 안 되는 건 안되더라.”
바라는 걸 이룬다고 만족할 수 있을까? 다 이룰 수도 없고, 막상 그리되도 만족하지 않는다.
지평선에 서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멀리서 보면 모두 다 지평선에 서있다.
어느새 집에 도착했다. 아이들이 뛰어나와 매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