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가족 네 가족

경산모는 더 힘듭니다

by 여행같은일상

감사하게도 다시 한번 임테기에 두줄이 나타났다.

반년 전 유산을 경험하며 나에게 가장 큰 위로가 된 건 다름 아닌 내 아이였다. 둘째 생각이 없던 나에게 아이 둘을 상상하게 만든 것도 내 볼에 뽀뽀를 해주며 웃는 내 보물 1호였다.


지난번 감정 없이 얘기하던 일본의 산부인과 의사가 아카짱(あかちゃん, akachan)이라고 얘기하는 순간 안도의 눈물이 돌았다. 구야쿠쇼(区役所, くやくしょ / kuyakusho)에 가서 일본의 모자수첩(母子手帳, ぼしてちょう / boshi techō)을 신청하니 임산부 배지와 검진 때마다 사용할 수 있는 쿠폰 그리고 택시 쿠폰을 내주었다.


같은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된다고 다짐했다. 콘비니서 습관처럼 사 오던 커피부터 끊고 라인매니저와 인사팀과 의논해서 팀을 바꾸고 업무 시간을 줄였다. 아이가 유치원을 가고부터는 침대에 반쯤 누워 일을 하고 주말에는 아빠와 데이트를 보내고 나는 침대에 누워 쉬었다.


평온한 임산부의 시간을 보내던 중 남편이 업무가 끝난 시간에 따로 개인 시간까지 할애해서 팀원과 상담하는 내용을 듣게 되었다. 그렇게까지 그 사람을 팀에 붙잡아야 하는 이유를 듣다가 저 세상 P인 나는 그럼 우리가 가자! 질러버렸다.


배가 불러오기 시작한 임산부가 세돌이 갓 지난 아이의 저녁을 먹이며 또다시 해외이주를 얘기하니 남편은 당황했다. 싱가포르에서 일본으로 올 때 남편은 주재원의 기회가 더 많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지금 그 순간이 온 것 같았다. 나의 화려한 싱글의 마지막 시간을 보낸 곳이자 남편과 함께 하기로 결정하며 내 커리어를 포기한 나라 영국이었다.


나는 출산을 두 달 앞두고 퇴사를 염두에 둔 육아휴직을 준비하였고 남편은 나와 아이가 한국행 비행기를 타던 날 영국으로 사전탐방 겸 출장을 떠났다. 이제 난 남편이 한국에 올 때까지 뱃속의 아이와 내 손을 잡고 있는 큰 아이까지 돌봐야 하는 경산부였다.


한국에 도착하고 며칠 후 아이를 지난겨울에 다니던 놀이학교에 등원시키고 병원에 갔다. 해외 이주를 생각하며 집정리를 하고 행정 업무차 너무 많이 돌아다녀서인지 경부 길이가 위험하다고 입원을 권유받았다. 선생님께 남편이 아직 오지 않았고 큰 아이가 있어서 어렵다고 사정했다.


그때부턴 피 말리는 시간이었다. 매주 진료를 갈 때마다 조기진통 수치를 재는 기계를 달고 그날도 무사히 집에 갈 수 있기만을 기도했다. 할머니댁에 있었지만 아빠의 부재가 불안한지 아이는 예민했다. 누워있다가도 아이가 하원을 하면 씻기고 먹이고 모두 엄마인 내가 해야 했다. 배변훈련 중이던 아이를 화장실에 들어앉히고 또 들어 내리고 뒷정리도 해주며 허리를 굽히는 건 막달 임산부에게는 버거웠다.


예정일이 한 달이 채 못남은 때 드디어 남편이 우리가 있는 한국에 왔고 뱃속의 아이도 37주를 넘어 만출에 가까워졌다. 모두들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버텨냈고 우리는 비로소 세 가족에서 네 가족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눈물겹던 워킹맘 경산모의 막바지 두 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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