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투병, 그럼에도 불구하고
암이라는 것이 확인이 되어도 절차에 따라 여러가지 검사를 받아야 했어요. 본격적으로 방사선 치료를 받기 전까지 병원 가실때마다 차로 모시고 다녔습니다.
여러가지 검사를 받고 힘드실 아빠를 생각해서 모시고 간 거였는데, 길을 잘 못 찾는 저는 아빠를 모시고 동네를 한바퀴씩 돌고는 했어요
부모님 댁으로 가는 길이 헤깔려서 10분씩 20분씩 더 걸리다가 어느 날은 이제 정말 아빠가 암 투병을 하는 환자가 되셨구나 생각에 혼미 했는지, 전혀 엉뚱한 길로 들어서고 말았어요.
그런 상황에서도 아빠는 짜증을 내지 않으셨어요. 길가에 트럭에서 판매하는 구운밤을 보시더니 밤을 사갈수 있다고 좋다시면서 오히려 제 입에 밤을 하나 넣어주셨어요. 오랫만에 구운 밤을 먹으니 맛있다고 하시던 아빠가 그립습니다.
본가를 가는 새로 생긴 길은 지금도 복잡하고 헤깔리게 느껴집니다. 잠시만 딴 생각을 해도 잘못 들어서게 되어 지금은 버스가 다니는 구길로 다닙니다.
아빠가 힘드실까봐 빨리 모시고 가야지 했다가 매번 땀을 삐질삐질 흘리던 저에게 아빠는 애썼다며 고생했다며 토닥여주시곤 했어요. 아빠는 정작 더 고생하고 애를 썼는데 모시고 간게 뭐라고 아빠는 늘 잔잔하게 마음을 표현해주셨어요.
제가 아빠를 모시고 다닐수 있었던건 한 주에 두세번 방사선 치료를 받을 때 까지였어요.
아빠는 방사선 치료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매일 병원을 가셔야했어요. 집에서 병원은 멀었고 방사선 치료가 예약된 시간은 너무 빨랐어요.
병원에 입원해서 치료를 받으시면 좋겠다 생각했지만, 입원할 수 있는 환자는 제한적이고, 위험한 치료를 받는 환자의 수는 많았어요.
버스로 택시로 이동이 가능하고 병원으로 태워주기도 하는 근처 암 전문 요양병원에 입원을 했습니다. 치료를 위해 이동 뿐 아니라 암 환자를 위한 식단에 몸에 필요한 영양제도 맞을 수 있는 병원이었어요.
아픈 아빠를 직접 모시고 다니는게 더 좋은걸까 고민도 했어요. 하지만 방사선 치료가 거듭될 수록 목 안쪽과 겉 피부가 녹고 피가 나서 식사도 못하게 되시면서 병원에서 처방해주는 영양주사가 아니면 버틸수가 없었어요.
다른 환자분들은 부위가 달라서 식사를 하셨는데, 아빠는 식사를 하실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어요. 그래도 아빠는 어떻게 하든 다시 건강해지시겠다는 의지로 맨밥에 물이라도 말아서 드시고 미음이나 죽을 처방받아 드시고 하셨어요.
그때의 아빠는 치료를 견디실 수 있는 체력이 되셨고, 함께 처방 받았던 영양제로 버틸수 있었어요. 아빠가 치료를 받으시는 과정을 보면서 이후에 또 같은 치료를 받게 되면 그때는 아빠가 치료를 받다가 돌아가시겠구나 생각했어요.
암세포를 죽이는 방사선 치료는 너무나 독했고, 암세포 뿐아니라 아빠의 생명을 유지하는 세포들까지 같이 죽였어요. 아빠는 치료를 받으면서 식도와 기도도 함께 상해서 많은 고통을 받으셨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힘든 방사선 치료를 이겨내신 아빠는 우리 곁에 9년을 더 계셔주셨어요.
밤을 좋아하셨던 아빠는 그 9년동안 우리들에게 밤을 보면 아빠를 떠올릴 수 있는 추억을 만들어주시고 훌쩍 여행을 떠나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