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는 말이 아닌, 서로를 잇는 말의 가치
말은 본래 서로를 잇는 다리이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그 다리를 허물어 벽으로 세운다. 논리라는 옷을 걸친 궤변이 그렇다. 그들의 말은 상황에 따라 얼굴을 바꾸고, 진실을 향하기보다는 상대가 본질을 보지 못하도록 연막을 친다.
순간적으로는 우위를 점한 듯 보인다. 패러다임을 뒤집는데서 오는 묘한 쾌감도 있을 것이다. 정당화의 망토를 두른 채 상황과 위치에 따라 목소리를 바꾸고, 결국은 내가 발 디딘 자리를 높이고자 하는 기교를 부린다.
마치 무대 위 배우가 장면마다 다른 가면을 바꿔 쓰듯, 궤변가의 언어는 늘 새 옷을 갈아입는다. 하지만 그 가면 뒤에는 일관된 얼굴이 없이, 오직 승리를 갈망하는 탐욕의 시선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자신이 상대보다 더 높은 자리에 섰다고 느끼는 순간, 잠시나마 희열을 맛보기도 할 테다.
하지만 궤변은 화려한 불꽃놀이와 닮았다. 높이 솟아올라 잠시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언정, 이내 연기만 남기고 사라진다. 화려함을 좇아 말을 꾸미다 보면, 어느새 곁을 지켜주던 사람들은 하나둘 떠나고, 남은 자리는 텅 빈 메아리뿐이다. 승리의 달콤함은 짧고, 외로움은 길다.
언어는 본디 서로 간의 다리를 놓기 위해 주어진 것이지, 인간과 인간 사이에 벽을 세우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궤변은 그 다리를 부수고 상대를 고립시킨다. 상대가 나를 이해하지 못하게 만드는 순간, 나는 스스로 고립의 방에 들어서게 된다. 언어의 성은 높아질지라도, 남은 자는 스스로의 그림자와만 대화할 뿐이다.
그렇기에 필요한 것이 '수그리는 자세'이다. 수그린다는 것은 단순히 고개를 낮추는 것이 아니다. 바람 앞에서 몸을 숙이는 갈대처럼, 굽힘을 통해 꺾이지 않는 힘을 갖는 일이다. 내가 옳다고 해도, 한 번쯤은 상대의 자리에서 생각해 보는 일, 이기는 대신 함께 좋은 길을 찾아 모색하는 일, 그 속에서 언어는 벽이 아니라 다리가 될 수 있다.
인생은 돌 하나 더 차지하는 싸움판이 아니라, 함께 무늬를 만들어가는 바둑판과 같다. 흰 돌과 검은 돌이 어우러질 때 비로소 한 폭의 그림이 탄생할 수 있지만, 혼자서만 무늬를 그리려 한다면 그것은 놀이가 아닌 독백에 불과하게 된다. 궤변은 그러한 독백의 유혹이고, 수그림은 함께 무늬를 이어가는 지혜이다.
언젠가 저물어가는 날의 석양을 바라볼 때, 우리의 기억 속에 오랫동안 남는 것은 내가 이겼던 논쟁이 아니라, 상대의 눈빛을 이해하려 애쓰던 순간이자 함께 웃었던 기억일 것이다. 궤변은 순간의 승리를 주지만, 수그림은 오래도록 지속되는 온기를 남긴다. 결국 중요한 것은 내가 이기는 말이 아니라, 우리를 잇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