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워내지 못한 감정의 자리
가끔은 내 안에 남은 감정들이 너무 많아서, 이것들을 한꺼번에 지워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단순히 누군가에게 받은 상처나 오랜 슬픔뿐 아니라, 내가 누군가에게 남겨버린 말들, 하지 말았으면 좋았을 말들, 무심결에 가볍게 건넸던 한 문장들이 아직도 마음 어딘가에서 자라나는 그런 감정들이다.
시간이 지나면 잊힐 줄 알았던 것들이 오히려 더 단단해져 마음의 흙 속에 깊이 박혀버린다. 다시는 자라나지 않게, 그러한 감정들을 뽑아내고 내 마음의 땅을 한 번에 갈아엎고 새롭게 시작하고 싶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감정이 한 번 마음속에 뿌리를 내리면 쉽게 뽑혀나가지 않는다. 지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감정은 다른 모양으로 다시 자라난다. 죄책감이 되어 돌아오거나, 사소한 순간에 문득 떠오르는 기억으로 다시 나를 붙들어 놓는다.
내가 왜 그런 말을 했을까, 그때 조금만 다르게 대했더라면 어땠을까, 조금만 더 기다리고 참아냈다면 어땠을까라는 생각들이 밤마다 마음의 가장자리에 달라붙는다. 그때는 한때의 실수였을지라도, 이제는 나의 일부가 되어 버린 말들이다.
어쩌면 사람은 '지운다'라는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감정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모양을 바꿔서 남는다. 내가 오해했던 감정들은 시간이 지나면 더 이상 혼란의 형태가 아니라 조용한 깨달음의 자취로 남고, 한때 분명히 옳다고 믿었던 생각들도 시간이 흐르며 나를 돌아보게 하는 부끄러움으로 남는다. 그리고 그때 던졌던 말은 내 안에서 되돌아와 불현듯 나를 찌르는 가시가 되기도 한다.
지워버리고 싶다는 생각은 결국 스스로에게 선고하는 불가능의 선언이다. 나는 내 안에서 불편한 감정을 뿌리 뽑으려 할수록, 그 감정이 남긴 흔적을 더 선명하게 보게 된다. 오래된 상처 위에 새살이 돋는 것처럼, 겉으로는 나아 보이지만 그 아래에는 여전히 완벽하게 치유되지 않은 통증이 남아 있다.
지워진 듯 보여도, 그 자리는 여전히 존재한다. 완전한 제거란 없고, 인간의 내면에서 '뿌리째 없애버린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이제는 조금 다른 생각을 가져본다. 지워야 한다고 믿었던 것들, 그 감정들과 함께 살아가는 연습을 해보려 한다. 쉽게 말해지는 관용이나 용서와는 다르게 그저 내 안의 불편함을 부정하지 않고서 그 자리를 인정하는 일이다.
때로는 그 생각이 나를 괴롭힐지라도, 그 감정이 여전히 내 안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 내가 아직 누군가를 느끼며 세상을 마주하고 있다는, 그리고 내가 완전히 식어버리지 않았다는 조용한 온기의 흔적일지도 모른다.
내가 저지른 실수들, 내가 무심코 던졌던 말들, 돌이킬 수 없는 어떠한 순간들을 완전히 없애려 하지 않고 그 위에 새로운 나의 하루를 조금씩 쌓아 올리려 한다. 딛고 일어나 다시 살아보겠다는 조용한 다짐, 어쩌면 지워지지 않는 것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존재이듯, 사라지지 않는 감정, 지워내지 못한 후회, 그 모든 것들이 모여 지금의 나를 만들어낸다.
그래서 그 감정들을 억지로 뽑아내려 하지 않는다. 대신 그 위에 새로운 생각을 심는다. 언젠가는 뽑아내고 싶은 생각의 뿌리는 마음의 흙 속에서 서서히 썩어갈 것이고, 그때 나의 후회와 미련도 천천히 흩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 다시 자라나는 건 조금은 단단해진 나 자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