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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_ 뿌리 내림의 시간

고통의 기다림이 빚어내는 단단함의 방

by Evanesce

Endurance [ ɪn|dʊrəns ]

1. 인내

2. 참을성


인내라는 단어에는 묘한 무게가 실려 있다. 단순히 시간을 견디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을 통과하면서 스스로 단련하는 힘이 숨어 있다. 우리는 흔히, "인내 끝에는 달콤한 열매가 있다."라고 말하지만, 현실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 때로는 애써 견뎌냄의 끝이 기대하던 결실이 아닐 때도 있다.


원하는 결과가 보장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허탈하게 다가올 수는 있지만, 인내의 의미는 결코 열매에만 있지 않다. 그 과정을 견디며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었는가, 바로 그 지점에서 인내의 가치는 빛을 발한다.


나무 한 그루가 뿌리를 내리는 과정을 떠올려본다면, 우리가 보는 나무의 모습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 변화가 없어 보이지만, 그 지표면 아래에는 쉼 없는 싸움이 이어진다. 단단한 흙을 비집고 들어가고, 바위에 막혀 방향을 틀어가며, 때로는 메마른 흙 속에서 버티며 조금씩 더 깊이 뿌리를 내리는 사투.


그 길은 어둡고 고단하지만, 과정을 건너뛸 수는 없다. 뿌리가 깊지 않은 나무는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고 가뭄 앞에서도 쉽게 시들어버린다. 뿌리가 단단히 내려간 나무는 폭풍 속에서도 꺾이지 않고, 더 깊은 곳의 자양분을 끌어올리며 오히려 더욱 성장하게 된다.



고통이란 그대의 깨달음을 가두고 있는 껍질이 깨어지는 것.

과일의 씨도 햇빛을 보려면 그 굳은 껍질을 깨야 하듯이,

그대 역시 고통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칼릴 지브란 - <예언자>



인내의 과정이 바로 그렇다. 우리의 오늘이 고통스럽고 무겁게만 느껴질지라도, 그 순간은 단순한 불행이 아닌 성장의 통증일 수 있다. 뿌리가 흙과 돌을 뚫고 들어가며 아픔을 겪듯, 우리가 겪어내는 지금의 시련 역시 우리를 조금 더 깊게 만들고, 흔들림 없는 힘을 길러주는 자양분이 된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그 과정 속에서 불안에 휩싸인다. 결과를 마주하기까지의 긴 시간은 다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고통으로 다가오며, 그 기다림의 시간조차 길고 무겁게만 느껴진다.


"혹시 내가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어떡하지, 내 생각과 반대의 흐름으로 흘러가면 어떡하지."라는 질문들이 끊임없이 머릿속을 맴돌며 우리들을 괴롭혀온다. 그 불안은 우리를 흔들고, 때로는 모든 노력이 헛될 것만 같은 두려움으로 몰아넣지만, 그 흔들림조차도 인내의 일부이다. 불확실함 속에서 버티는 시간, 그것이야말로 인내가 가진 가장 치열한 얼굴이다.


삶은 우리가 원하는 결과를 언제나 가져다주지 않는다. 때로는 열심히 달려온 길 끝에서 기대와는 전혀 다른 문을 마주할 때도 있다. 왜 나에게 이런 일들만 일어나는지를 묻게 되지만, 시간이 흐른 뒤에 돌아보면, 그 질문보다 더 중요한 물음은 "이 시간을 통해 나는 무엇을 배우고 있는가."라는 중요한 물음이 숨어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결과가 뜻대로 되지 않았더라도, 그 과정을 통해 내 안에 남은 것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내일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기초가 되고, 다시 일어설 힘이 되어 준다.


인내는 그래서 목적지가 아닌 길 그 자체에 가깝다. 끝에 맺히는 열매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 길을 걸으며 나 자신이 어떻게 변화를 이루어왔는가일 것이다. 고통 속에 묵묵히 버틴 그 시간이, 내 안에 깊이 스며들어 살아가는 힘이 된다. 인내의 시간은 '겨울 한가운데에서 느껴지는 내 안의 여름'과 같다. 눈보라가 몰아쳐도 사라지지 않는 내적인 힘, 그 힘은 오직 인내와 과정을 거쳐 통과해 낸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선물이다.


우리는 모두 보이지 않는 우리만의 자리에서 뿌리를 내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성과가 없다는 생각에 자신이 초라해 보일 수도 있지만, 그 순간조차 삶의 일부다. 오늘의 눈물이 헛되지 않은 이유는 그것이 내일의 우리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 단단함은 결국 다시 일어날 용기로, 더 큰 삶을 품어낼 수 있는 여유로 확장된다.


인내 끝에 달린 열매가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길을 통과함으로써 이미 우리는 달라져 있다. 깊어진 마음, 단단해진 눈빛, 그리고 다시 살아갈 힘. 인내가 우리에게 남긴 진실된 선물은 바로 그런 변화들이고, 결과가 아닌 과정 속에서 우리는 성장해 나간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묵묵히 뿌리를 내리고 있다.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아픔을 감내하며, 조금씩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가고 있다. 시간이 흐른 뒤, 언젠가 우리는 깨닫게 된다. 오늘의 고통이 헛되지 않았음을, 그리고 그것이 결국 우리를 더욱 성장한 모습으로 만들어 주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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