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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 _ 선함의 그림자 아래에서

부드러운 거짓과 불편한 진실 사이

by Evanesce

Hypocrisy [ hɪpɑːkrəsi ]

1. 위선


인간은 누구나 선한 척을 하며 살아간다. 내가 선한 것처럼 보일수록 관계는 부드럽게 유지되고, 세상과 부딪히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척'이 반복될수록, 사람은 자신이 언제부터 연기를 하기 시작했는지조차 잊어버리게 된다. 진심은 우리가 쓰고 있는 가면 아래로 밀려나고, 도덕은 의식보다 습관이 되며, 말은 생각보다 먼저 튀어나와 버리는 자동 반사적 반응이 된다.


진실은 때로 불편하다. 그래서 우리는 진실처럼 보이는 것이 우리를 더욱 안전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무의식적으로 느끼게 되는 것이다.


위선은 인간의 불완전함에서 비롯된다고들 말하지만, 그건 단지 나약함에서 비롯된 문제가 아니라 훨씬 더 구조적인 습관이다. 우리는 타인을 속이기 이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속인다. 죄의식이 아니라 자기 보호의 본능에 가까운 행위이다. 자신이 좋은 사람이라는 믿음을 잃는 순간, 자존감은 금세 무너져 내리고, 존재의 균형이 흔들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를 설득하기 위해 선한 척을 하고, 연기를 하게 되며, 가면을 뒤집어쓴다. 그리고 그 가면을 써온 시간이 오래될수록, 본연의 얼굴보다 그 가면이 더 진짜가 되어버린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의 위선은 예전처럼 조잡하지 않다. 이제는 세련된 언어로 포장된 하나의 사회적 규범처럼 느껴질 정도이다. 사람들은 '배려'와 '공감'이라는 단어를 무기로 삼아, 불편한 진실을 말하지 않는 쪽을 더 성숙한 태도로 여긴다.


그러나 그 배려의 말 뒤에는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다. 공감이 아니라 감정의 회피이며, 연민이 아니라 관계의 관리에 불과하다. 그렇게 사람들은 서로를 이해한다고 말하면서, 사실은 더 이상 아무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는다. 선함의 언어가 진실을 가리기 시작하면, 도덕은 더 이상 윤리가 아니라 미용이 된다.


가끔은 그런 세상이 무섭다. 도덕은 점점 더 부드러워지고, 진실은 점점 더 설 자리를 잃어 간다. 거짓보다는 불편함을 더욱 두려워하는 세상 속에서, 정직한 말보다는 기분 좋은 말만을 택하고, 진심보다 분위기를 우선시하게 된다.


그 결과로, 대화는 예의 바르지만 속은 비어 있고, 관계는 따뜻할지언정 한없이 얇아진다. 우리가 그렇게 완벽하게 서로를 배려할수록 진심은 점점 더 설 곳을 잃는다. 위선의 진짜 문제는 그것이 완전히 진실을 대체해 버릴 때, 더 이상 진심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들이 되어간다는 점이다.


진실은 언제나 불편한 곳에서 피어난다. 사람을 다치게 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숨 쉬게도 한다. 진실이란 단순히 사실을 말하는 일이 아니라, 자신의 모순과 부끄러움을 감당해 내는 일이다. 그 감당의 시간이 사람을 더욱 단단하게 만든다.


위선은 관계를 부드럽게 만들지만, 진실은 관계를 살아 있게 한다. 위선은 사람을 보호하지만, 진실은 사람을 성장시킨다.


우리가 진실을 불편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그것이 언제나 자기 자신부터 겨누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불편함을 견뎌낼수록 더욱 자유로워질 수 있다.


위선을 단지 인간적인 약점으로는 이해하고 싶지 않다. 위선은 우리 사회의 가장 세련된 자기기만이며, 그 기만은 언제나 그럴듯한 선의의 얼굴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단정한 얼굴일지라도 진실의 부재는 결국 무너짐을 초래한다. 그리고 그 무너짐의 순간이 오히려 구원일지도 모른다. 진실은 위선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위선을 끝까지 마주했을 때에 비로소 드러나는 빛일 수 있기 때문이다.


위선을 버리는 일은 세상을 더 선하게 만드는 일이라기보다는, 단지 그 속에서 진실이 다시 말할 수 있는 공간을 되찾는 일이라 믿고 싶다. 진실은 여전히 불편하고, 여전히 위험하지만 그 불편함을 감수하지 않는 한 결코 인간답게 말할 수도, 느낄 수도 없다. 이렇듯 위선이 사회를 부드럽게 만든다면, 진실은 그 사회를 다시 숨 쉬게 만든다.


더 어렵고, 더 외로운 방식이지만 결국 그 불편함을 겪어내는 순간을 거쳐야만 우리는 비로소 사람답게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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