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은 학생 곁을 지키라 했다.

보건교사 자리의 의미를 다시 묻다

by 평범한 보건교사

학교 복도는 언제나 분주하다.
그 틈을 타 보건실 문이 살짝 열린다.
“선생님, 배가 아파요.”
작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보건교사는 자연스럽게 손을 내민다.
그 손끝에는 언제나 ‘괜찮다’는 말보다 ‘세심함’이 먼저 있다.
하루에도 수십 번, 학생들의 건강과 마음을 동시에 살피는 일.
그것이 학교의 보건교사가 맡은 자리다.

학교는 언제나 예상치 못한 건강 위기 속에 놓여 있다.
급식 시간에 체한 학생, 운동장에서 다친 학생,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학생,
그리고 매일 약을 복용해야 하는 학생까지.
이 복잡하고 긴박한 상황 속에서 학생의 상태를 가장 정확히 판단하고 대응할 수 있는 전문가는 단 한 사람, 보건교사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 자리가 흔들리고 있다.
보건교사가 교실로 나가야 하는 상황이 늘어나면서,
보건실은 ‘잠시 맡겨진 공간’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일반교사를 대신 투입하거나 ‘보조 인력’을 두는 사례가 늘고 있다.
겉보기엔 “보건실 공백을 메우는 좋은 제도”처럼 들리지만,
법의 본래 취지는 전혀 다르다.


1. 법이 말한 건 ‘보건실을 지켜라’가 아니라 ‘아픈 학생 곁을 지켜라’였다


학교보건법 제15조의 2 제3항은 이렇게 말한다.

“질병이나 장애로 특별한 관리가 필요한 학생을 위해 보조 인력을 둘 수 있다.”

이 조항은 보건교사 한 사람이 전교생을 책임져야 하는 현실 속에서,

그중 조금 더 세심한 보살핌이 필요한 아이 곁에 한 사람이라도 더 붙일 수 있도록 만든 법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 뜻이 완전히 뒤집혔다.

지금의 현장은 이 조항을 “보건실을 대신 지키는 인력 운영”의 근거로 삼고 있다.

법은 원래, 1형 당뇨나 아나필락시스 등 질병이나 장애로 인해 특별한 보호가 필요한 학생 옆의 손길을 말했지만,

현장은 그 의미를 ‘빈 보건실의 열쇠를 맡긴 것’으로 바꾸어버렸다.

법이 품은 따뜻한 취지는 행정의 편의 속에 묻혀버렸다.



2. 대체할 수 없는 자리, 보건교사의 전문성


보건교사는 단순히 응급처치를 하는 사람이 아니다.

1년 동안 학생들의 건강 정보를 축적하고,

그 데이터를 통해 위험을 예측하며,

응급 대응 체계를 설계하고,

교사·학부모·지역사회와 협력해 학교의 건강 시스템을 관리한다.


보조 인력은 그 곁에서 도움을 주는 역할일 뿐,

보건교사를 대신할 수는 없다.

의료법과 학교보건법은 모두,

의사의 지시나 보건교사의 감독 없이 이루어지는 의료행위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현실에서는 보건교사가 부재한 보건실에서

보조 인력이 홀로 학생을 돌보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그 순간, 아이의 안전은 법의 사각지대에 놓인다.


* 참고 : '학교'에서 '의료행위'가 허락된 단 하나의 자리

https://brunch.co.kr/@a06416bb6abf41f/4



3. ‘편의의 구조’는 결국 아이들의 불안을 만든다


보건교사의 공백은 단순한 인력 문제를 넘어, 아이들의 불안으로 이어진다.

만약 천식이 심한 아이가 숨을 가쁘게 쉬는 순간,

혹은 알레르기 반응으로 얼굴이 붓기 시작하는 순간,

그 옆에 누가 서 있을까?


보건교사가 아닌 사람이 있다면, 그는 판단을 미루고 전화를 걸어야 한다.

“선생님, 지금 아이가 이런데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 몇 초의 지연이, 때로는 너무 길다.

보건교사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이미 의료적 판단을 마치고

적절한 대처를 시작했을 것이다.

그 차이가 아이의 생명을 지킬 수 있는 골든타임이 되기도 한다.



4. 진짜 해결책은 ‘자리의 복원’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보건교사를 대신 세울 사람이 아니다.

보건교사가 본래의 자리, 보건실에 있을 수 있는 학교다.

보건교사는 보건실을 지켜야 하고, 보조 인력은 보건교사의 지시에 따라 특별한 관리가 필요한 학생을 보살펴야 한다.


이 두 역할을 명확히 구분하는 것이 법의 취지에 맞는 운영이며, 학생의 건강권을 지켜내는 최소한의 장치다.


마무리하며,


보건실의 불빛은 꺼지면 안 된다.
그곳은 아이들이 ‘괜찮아질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법은 그 불빛이 꺼지지 않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행정의 편의는 그 불빛을 점점 희미하게 만들고 있다.

아픈 아이 곁의 빈자리를 다시 채우는 일, 그것이 학교보건법 제15조의 2와 시행규칙 제11조가 만들어진 이유이며, 학교라는 교육공동체가 지켜야 할 최소한의 윤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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