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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달장애인, 간병보조인으로 날아 오른 제자들(1편)

좋은 세상에서 좋은 사람들을 만나

by 윤호근

발달장애인, 간병보조인으로 날아오른 제자들(1편)



제자들이 졸업한 지 시간이 꽤 지났다. 세월은 참 빠르다. 그때 내 손을 거쳐 간 제자들이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까 문득 궁금해질 때가 있다. 그중 몇몇은 연락이 닿아 소식을 전해 듣지만, 대부분은 각자의 삶 속으로 사라져 간다.


그래도 잊히지 않는 제자들이 있다. 대형병원에 간병보조인으로 취업한 여섯 명의 제자들. 처음 네 명이 함께 문을 두드렸고, 몇 달 후 두 명이 더 합류했다. 여학생 다섯, 남학생 하나. 그 속에서 유독 기억에 남는 두 명의 얼굴이 있다.




전주에 사는 한 여학생이 있었다. 발달장애인이었지만 일반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아이였다. 처음 그 아이를 봤을 때 나는 놀랐다. 예쁜 얼굴, 단정한 인상. 누가 봐도 비장애인처럼 보였다. 아니, 비장애인들 사이에 섞여 있어도 전혀 구별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남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아이는 그저 수줍게 웃을 뿐이었다. 그 웃음 속에 얼마나 많은 노력이 숨어 있는지, 당시엔 미처 다 헤아리지 못했다.


어느 날 내가 물었다.


"너는 어떤 일을 하고 싶니? 어떤 분야에서 일하고 싶어?"


그 아이는 잠시 생각하더니 또렷하게 대답했다.


"선생님, 저는 봉사하는 것처럼 사람들을 돌보는 일을 하고 싶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이 아이가 정말 특별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단순히 일자리를 원하는 게 아니었다. 누군가를 돌보고 싶다는, 그 순수한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마침 그때 지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대형병원에서 간병보조 인력이 필요하다는 소식이었다.


"몇 명이나 필요한데?"


"네 명이요."


딱 맞았다. 나는 곧바로 학생들을 선발해 실습에 들어갔다. 물론 학교에서 하는 실습이 병원 현장과 완전히 같을 수는 없다. 하지만 적응을 위해서는 반복 연습이 필수였다. 매일매일, 꾸준히.


환자 침대 정리하는 법, 식사 보조하는 법, 휠체어 밀어주는 법, 기저귀 교체하는 법. 하나하나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가르쳤다. 그 전주 여학생은 특히 열심이었다. 자신이 원하던 일이라며 눈을 반짝였다.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보람을 느꼈다.


한 달이 지났다. 드디어 면접 날이 왔다.




네 명의 제자가 면접장에 섰다. 떨리는 마음을 숨기려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중 한 명, 남학생은 유독 긴장한 듯 보였다. 면접은 예상대로 쉽지 않았다. 특히 그 남학생은 제대로 답변을 하지 못했다.


면접이 끝난 후 병원 측에서 연락이 왔다. 세 명은 합격인데, 남학생 한 명은 조금 어려울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전화를 걸어 설득했다.


"시간을 주시면 됩니다. 이 아이도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느릴 수는 있어도, 성실합니다."


다행히 병원 측에서 기회를 주었다. 네 명 모두 합격. 2주 실습 후 3개월 수습 기간을 거치기로 했다.




학생들을 현장에 투입한 후, 나는 매일 병원에 들렀다. 잘하고 있는지, 어려움은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담당 관리자를 만날 때마다 당부했다.


"우리 학생들이 직무 수행이 느리고 아직 서툽니다. 하지만 기다려주시면 천천히 적응할 겁니다."


관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이해해 주는 분들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네 명 중 그 남학생만 유독 적응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일 처리가 느리고, 실수도 잦았다. 나는 따로 불러 격려했지만, 그 아이의 눈에는 자신감이 보이지 않았다.


반면 가장 잘하는 학생은 단연 그 전주에서 온 여학생이었다. 예쁜 외모에 예의까지 바른 덕분에 병원 관계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다. 칭찬도 자주 받았다. 환자들도 그 아이를 좋아했다.


어느 날 네 명을 모두 불러 물었다.


"어때? 일은 재미있니? 힘들진 않고?"


전주 여학생이 먼저 대답했다.


"선생님, 재미있어요! 환자분들이 고맙다고 하실 때 정말 뿌듯해요."


다른 두 명도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잘 적응하고 있다는 대답이었다.


하지만 남학생만은 말이 없었다. 그 침묵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2주 실습이 끝나고 드디어 정식 채용이 결정되었다. 남학생은 처음엔 망설였다. 자신감이 없었던 것이다. 나는 그 아이를 설득했다.


"천천히 해도 돼. 네가 할 수 있어."


3개월 수습 기간이 지나고, 네 명 모두 정규직이 되었다. 시간이 흘렀다. 남학생과 다른 여학생 한 명은 무려 7년을 근무했고, 나머지 네 명은 3년 정도 일했다. 그러다 결국 병원 측에서 더 이상 간병보조 역할을 유지할 수 없다는 입장을 전해왔다. 아쉬웠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전주에서 온 그 여학생은 병원 근처에 원룸을 얻어 혼자 살았다. 집이 전주였기 때문에 통근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나는 그 아이를 따로 불러 신신당부했다.



"다른 사람들을 조심해라. 혹시 남학생들이 집에 놀러 오겠다고 해도 절대 들이지 마. 무슨 일이 있으면 엄마나 선생님께 바로 전화해. 그리고 원룸 비밀번호는 절대,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가르쳐주지 마."


내 걱정은 기우가 아니었다. 어느 날 그 아이에게서 급하게 전화가 왔다.


"선생님, 어떤 남자가 퇴근할 때 계속 따라와요. 무서워요."


다행히 퇴근 시간이 해가 지기 전이라 큰일은 없었다. 하지만 그때부터 나는 더욱 세심하게 그 아이를 챙겼다.




병원에서 그 여학생은 인기가 많았다. 환자들도, 보호자들도, 동료들도 모두 좋아했다. 그러던 중 한 비장애인 남성이 그 아이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대시를 한 것이다.


그 남성은 그 아이가 발달장애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속으로 걱정했다. 이제 관심이 식겠지. 하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그 남성은 여전히 그 아이를 좋아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우리 사회에도 장애인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구나. 살 만한 세상이구나.'


7년이 지난 후, 그 여학생은 좋은 남자를 만나 결혼했다. 지금도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고 한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눈물이 났다. 기쁨의 눈물이었다.




이렇게 훈훈한 이야기를 보며 나는 깨달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장애학생들을 가르치고, 독립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돕고, 취업의 꿈을 주고, 취업 후에도 제자들과 모임을 갖는 것. 이것이 바로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


제자들이 계속해서 건강했으면 좋겠다. 좋은 세상에서 좋은 사람들을 만나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또 다른 제자들을 가르친다. 그들에게도 꿈을 주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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