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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살_엄마의 죽음

2010년도 어느 날

by 테토솜

대학교 2학년이었던 20살 엄마가 돌아가셨다.

기나긴 투병생활을 하셨는데 처음 몸의 이상을 발견한 건 내가 중학교 때였다. 그때 엄마의 나이는 36살. 엄마가 결혼을 일찍 해서 나는 91년생 엄마는 71년생이었다. 현재 내가 35살이니 그때 엄마 나이랑 비슷하다.

그 당시 난소에 작은 혹이 발견되었는데 경계성종양이라고 했다. 수술을 했고 예방차원에서 항암치료까지 진행했다. 그 당시 나와 동생은 너무 어렸고 병원에서 하라는 대로 했다. 독한 항암치료를 견뎌내느라 힘들어하셨고 그 시기 강원도에서 오랜 기간 거주하다가 울산으로 이사도 하고 여러 가지 스트레스 상황들이 많았다. 항암치료가 끝난 뒤에도 서울과 울산을 오가며 매년 정기검진도 빠지지 않고 다녔다. 다시 건강을 되찾은 줄 알았지만 2009년 가을쯤 병원에서 청천벽력 같은 전화 한 통을 받았다.


" 검진 결과가 조금 이상합니다. 다시 내원해 주세요"


엄마는 병원으로 갔고 추가적인 검사들을 진행했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매년 받던 정기검진에서 놓친 부분이 있었고 발견한 시기에는 이미 손을 쓸 수 없이 퍼진 이후였다. 말기암 판정. 병원에서는 길어야 3개월의 시간만 남았다고 했다.


아빠는 직장 때문에 나는 학업 때문에 현실적으로 엄마를 옆에서 케어해 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 초반에는 집에서 같이 지내다 복수가 차기 시작하고 이대로는 안될 거 같아 청도에 있는 호스피스 병원도 들어가 보고(암환자들을 위한 식이요법) 할머니, 할아버지가 계신 강원도 홍천의 공기 좋은 곳도 가보고 결국 나중엔 김포 외할머니 집으로 가게 되었다. 마지막 투병생활을 가족과 함께 지낸 게 아니라 임종 때까지 자주 못 봤다. 그게 아직까지도 너무 아쉽다.


2009년도 19살, 대학교 1학년

같은 학년이지만 나는 더 어렸기에 시샘 아닌 시샘을 받았다.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에 붙임성도 없어서 적응하는 게 쉽지 않았다. 어려움이 많았어서 사실 나 외의 상황은 하나도 안 들어왔다. 2학년이 되어서도 쉽지 않았고 엄마가 집을 비웠기에 집안일도 내 몫이었다. 학교를 다니며 집안일도 해야 했던 19~20살. 나도 내 나름대로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거 같다.


시한부 3개월이라던 판정을 거의 1년 가까이 엄마는 잘 견뎌줬다. 각자의 삶을 살다가 2010년도 추석 연휴가 시작될 때 우리 모두 김포 외할머니 집에 모였다. 아빠는 서울에서 일정이 있었고 나도 학기 중이라 수업을 뺄 수 없어서 수업 마치고 동생을 태워서 6시간 가까이를 혼자 운전해서 김포에 도착했다. 엄마는 못본사가 너무 많이 야윈 모습이었다. 앙상한 뼈밖에 남지 않았다. 이제 정말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는 시기가 눈앞에 보였다. 엄마는 혼자 몸을 가누기도 힘들고 통증으로 너무 괴로워했고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상태였고 엄마는 울산 집에 가고 싶다고 했다. 병원에서 생을 마감하고 싶지 않다고 해서 추석 당일 김포에서 울산까지 이동하기로 했다. 문제는 아빠가 외국으로 출국을 해야 하는 일정이 잡혀있었고 아예 안 갈 수는 없는 일정이라 갔다가 최대한 빨리 귀국하겠다고 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싶었지만 이미 나는 녹초가 된 상태로 도착한 거라 울면서 겨우 잠을 청했다.


다음날 아침 2010년 9월 22일 추석명절 당일이었다. 나의 양력과 음력 생일이 똑같은 날짜이던 만 19세 생일


울산으로 출발하기 전 엄마는 아픈 와중에도 내 생일이라고 외할머니한테 부탁해서 내가 좋아하는 반찬들로 상다리 휘어지게 차려진 생일상 앞에 앉은 나는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말도 제대로 못 할 정도로 힘든 목소리로

"울지 말고 천천히 맛있게 먹어. 생일축하해"

엄마가 챙겨준 마지막 생일상이었다.


아빠는 새벽 일찍 출국을 했고 나는 외할머니랑 이모를 모시고 ktx를 타러 갔고

동생이랑 우리 가족과 오래된 지인(우리가 삼촌이라 부르는)과 엄마는 차로 이동했다.

추석명절 당일이라 거꾸로 내려가는 거긴 하지만 그래도 명절은 명절이었다.

중간에 차가 너무 막히고 엄마가 힘들어해서 고속도로 한복판에서 구급차를 타고 이동했고, 엄마가 울산까지 갈 컨디션이 안되고 아빠도 한국에 없는 상황이라 대구에 있는 대학병원 응급실로 목적지를 바꿨다.

아빠의 오래된 지인 분 중에 이동하기로 한 대학병원 교수님이 계셔서 응급실 도착 이후에 아빠랑 계속 통화를 하시며 상황을 수습해 주셨다.


응급실 도착해서 인을 잡아야 하는데 뼈밖에 없어서 주삿바늘을 놓을 수가 없는 상태였다. 팔, 손, 발 여기저기 찾다가 기흉이 올 수도 있다고 하더니 처음 보는? 위치에 시도하다 안되고 다른 분이 오셔서 팔에 가까스로 라인을 잡았다. 병원에서 해줄 수 있는 게 없는 환자라 일단 아빠가 올 때까지 입원하기로 하고 병실로 올라갔고 마약성 진통제를 투여하기 시작했다. 진통제가 들어가니 누워만 있던 엄마가 앉기도 하고 말도 또박또박 잘했다. 아빠는 귀국 일정을 앞당겨 다음날 귀국하는 걸로 얘기가 되었다. 마약성 진통제는 계속 맞을 수 있는 건 아니고 시간에 따라 용량이 정해져 있어서 효과가 떨어질 때쯤 엄마는 괴로워했다. 밤새 돌아가며 엄마 곁을 지켰고 엄마가 찬송가 '오 신실하신 주'를 불러달라고 했다. 아직도 그 찬송가를 생각하면 엄마가 생각난다.


그날 새벽, 응급실에서 잘못된 처치로 기흉이 생겨 산소포화도가 급격히 낮아지고 있었다. 흉관 삽입술을 진행해야 될 거 같다고 아니면 오늘 밤을 넘기시기 힘들 거 같다는 말에 시술을 진행했다. 사실 엄마는 시술하기 싫다고 견뎌보겠다고 했지만 숨 쉬는 게 너무 힘들어 보였다. 시술은 잘됐지만 엄마는 시술 이후 인공호흡기를 꽂았다. 버틸 수 있는 체력이 바닥난 상황. 시술하는 걸 지켜본 삼촌은 우리가 기다리고 있던 옆에 휴게실로 돌아와 꺼이꺼이 울기 시작했다. 투덜대던 삼촌의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병실에서 간호사실 어딘가로 엄마 침대는 옮겨졌다. 아빠는 아직 귀국하지 않았다.


점점 엄마는 상태가 안 좋아졌다. 정말 죽음을 앞둔 사람의 몸은 어떻게 변해가는지 보여줬다. 창백한 얼굴과 초점 잃은 눈동자, 차가워지는 손과 발, 눈에 처음 보는 것들이 맺혀있었다. 엄마가 힘겹게 버티는 중에 아빠가 오전에 병원으로 도착했다. 그러자 엄마가 기적처럼 다시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차가워졌던 몸이 따스해지고 눈에 맺혔던 것들이 사라지고 인공호흡기를 끼고 있지만 무엇인가 말하고 싶은 눈빛이었다. 아빠는 엄마를 보며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미안하고 고맙고 사랑한다는 말을 엄마한테 들려주었다. 나와 동생도 마찬가지. 의식은 없어도 분명히 들을 테니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

엄마의 상태가 울산까지는 갈 수 없고 이대로 계속 힘든 상황을 버티게 하는 것도 안되고 호흡기를 떼냐 마냐 현실적인 고민들. 결국 상의 끝에 호흡기를 떼기로 결정했고 약 1시간 30분 뒤에 엄마는 아픔이 없는 곳으로 떠났다. 엄마는 우리 걱정에 눈도 제대로 감지 못했다.


엄마의 마지막과 나의 생일은 잊으래야 잊을 수가 없는 기억들이다. 이때를 떠올리면 그때의 선택들이 후회되기도 한다. 그때 엄마가 원하던 집으로 가면 어땠을까. 호흡기를 떼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요즘 동생과 하는 얘기는 '우리가 너무 무지했다. 항암치료 할 일도 아니었는데 너무 몰랐다'라는 얘기를 종종 한다. 하지만 그때의 우리가 할 수 있었던 최선을 했고 이제는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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