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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살_엄마가 되었다

도피성 결혼

by 테토솜

2012년 2월 혼식

2012년 7월 출산


만난 지 7개월 만의 결혼식 했고 결혼한 지 5개월 만의 아이를 낳았다.


대학교 3학년 여름방학에 만나 울산-인천 장거리 연애를 하며 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몸이 좀 피곤하고 감기기운이 있고 입맛이 없었다 정도였다. 생리주기를 파악하고 있는 성격이 아니었어서 단번에 알아채지 못했다. 테스트기 두 줄이 떴을 당시 어느 누구와 상의를 할 수도 없었고, 이걸 어디서부터 어떻게 얘기해야 할지 몰랐다. 큰 마음먹고 병원을 갔지만 그냥 확인만 하고 돌아왔다.


이미 연애하면서 우리 집에 놀러 와서 인사도 하고 밥도 먹어서 만나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아빠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임신 사실을 알고 우리 집에 찾아와 무릎 꿇고 얘기하던 X. 불같이 화낼 줄 알았던 아빠는 의외로 차분하게 얘기를 들었고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 대화를 했다. 나는 일단 학교를 계속 다니면서 이런저런 얘기가 오고 갔다. 할아버지가 그때 아빠한테 한소리 하셨다. " 그렇게 일만 하더니 애한테 뭐라고 하지 마라, 뭐라 할 자격이 없다."였다. 그 말이 뭔가 내 마음에 계속 남았다. 나의 마음을 알아주는 말이었을까?


상의 끝에 아이를 낳기로 결정했고 아빠의 직업 특성상 반공인이었던 터라 나의 결혼 소식이 뜨거운 이슈가 되었다. 나와 통화하지도 않았는데 통화해서 확인한 사실이다. 내가 헛구역질을 하면서 화장실로 뛰어가는 걸 봤다 등의 온갖 루머가 돌기 시작했고 나는 어쩔 수 없이 X의 집으로 피신 아닌 피신을 했다. 그때 X의 부모님을 처음 만난 날 바로 합가 해서 살기 시작했다.


그리고 타지에서 혼자 결혼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둘 다 학생이었기에 당장 신혼집을 구하지는 않았다. 나도 학업을 마쳐야 했고 X도 학업을 마쳤으면 해서 지역을 옮겨 다녀야 했다. 신혼집이 없으니 혼수는 따로 알아볼 게 없었고 예식장, 스드메 정도만 알아봤다. 22살 어디서 어떤 정보를 얻을 수 있었을까? 또래 친구들은 놀기 바빴고 나는 이것저것 검색하며 정보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어른들의 도움을 얻어 준비하는 거라 적정한 가격대도 중요했다. 우리 집은 아빠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주의였고 아버지는 정반대였다. 대신 시어머니가 한번 하는 거니 하고 싶은 거 해주자였어서 이런저런 상의를 하며 진행했다. 상견례도 화기애애했지만 서로 기싸움 아닌 기싸움을 하시기도 하고 좌불안석이었다. 말에 딸 가진 죄인이라는 게 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양쪽 어른들 다 계획하고 예상했던 일이 아니었기에 당황스러우실만하다. 어른들 모두 40대이셨으니. 그리고 여러 가지 상황이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흘러가니 이게 뭔가 싶기도 하셨다.


나는 임신 초기 심한 입덧으로 X의 집에서 어른들 눈치 보며 지내야 하는 게 쉽지 않았다. 그중에 입덧으로 힘들 때 엄마의 음식이 제일 그리웠다. 엄마가 해주던 닭볶음탕이 너무 먹고 싶었다. 결혼, 임신을 하면서 그제야 엄마의 빈자리를 실감했다. 나는 엄마가 없구나.


그렇게 3학년 겨울방학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한 달 가까이 짧은 시간에 식장 예약도 하고 스드메도 찍고 우여곡절 끝에 식도 무사히 마치고, 식 올릴 당시 이미 20주가 다 되어가던 시기라 신혼여행은 가까운 제주도로 다녀왔다. 그리고 내가 마지막 4학년 1년은 학교를 다녀야 해서 부산의 풀옵션 원룸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아빠는 그 시기에 재혼을 하셨다. 부모의 재혼과 딸의 결혼, 인생의 중요한 것들이 한 달 간격으로 일어났다.


60평대 아파트 내 방보다 작은 원룸에서 시작된 신혼생활은 나름 재밌었다. 어른들 눈치 안 봐도 되고 이것저것 요리도 해 먹고 가 좋아하는 학업을 중단하지 않아도 됐고, 누군가 내 옆에 있고 혼자 있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안정감을 느꼈다. 학교를 다니며 출산 가능한 산부인과 병원도 알아보고 출산 준비도 하고 정신이 없었다.


4학년 1학기가 끝나는 6월 중순, 36주까지 학교를 다녔고 중간고사, 기말고사, 실기시험까지 무사히 마쳤다. 교수님들이 많이 배려해 주셨다. 사실 내가 박스티 입으면 티가 하나도 안 나서 만삭까지도 모르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여름방학과 동시에 첫째를 낳았다. 엄마가 없으니 출산에 대해 물어볼 곳이 없었다. 육아 서적을 읽고, 사람들이 올린 출산 후기를 찾아보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병원에 가야 하는 증상, 출산이 임박하면 뭘 해야 하는지 등등 그리고 그게 도움이 되었고 무사히 출산을 했다.


가족분만실에 저녁 6시에 들어갔는데 초산이라 당연히 다음날은 되어야 나올 거라고 예상했는지 분만실도 여유로웠다. 중간에 아빠도 병원에 다녀갔다. 그때까지만 해도 하하 호호 웃으며 얘기하고 무통주사도 안 맞고(주삿바늘 꽂는 게 겁나서) 밤 12시까지 정말 괜찮았다. 견디기 힘든 진통은 3시간이었는데 정말 너무 힘들었다. 나중엔 무통주사를 왜 안 맞았을까 후회했다. 가족분만실에서는 X와 여동생이 내 옆을 지키고 있었고 동생과 X는 힘들어하는 내 모습을 보며 옆에서 눈물을 보였다. 새벽 3시 즈음 비몽사몽한 얼굴의 당직 선생님이 오셔서 아이를 받아주셨다. 아이 울음소리가 들렸을 때 우리 모두 안도했다.


나는 산모들 중에서 가장 어렸다. 22살 생일도 지나지 않아 환자카드에 적힌 나이는 만 20세였다. 분만실 간호사선생님이 휠체어를 가져다주셨지만 나는 걸어 나갔다. 간호사 선생님의 "역시 어리니까 다르네"였다. 왜 어른들이 어릴 때 낳으라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시어머니가 몸조리 잘해야 한다고 조리원 결제해 주시고 2주 동안 산후조리원에서 편하게 쉬다 나왔다. 당시 조리원 동기들은 나보다 10살 많은 81년생 30대 초반 언니들, 지금은 30대 초반 산모라면 굉장히 어린 편에 속하지만 당시에는 30대 초반이 대부분이었다.


조리원 퇴소 후 집에 돌아왔을 땐 정말 너무 힘들었다. 4학년 2학기는 중요한 졸업연주가 있었지만 나는 준비할 시간이 없었다. 피아노 연습은커녕 갓난쟁이 아기와 고군분투하며 그렇게 4학년 여름방학이 흘러갔다.


4학년 1학기 만삭일 때 객원교수님이 나를 따로 부르셨고 출산예정일이 언제냐고 물어보시며 2학기때는 어떻게 할 거냐고 물어보셨다. 학교는 계속 다닐 거라고 하니 아이 돌봄 서비스를 추천해 주셨다. 본인도 이용하고 있는데 너무 좋다고 학생이니 조건이 까다롭지 않을 거라고 하셨다. 아기 낳고 2학기 다닐 거면 꼭 신청해서 다니라고 조언해 주셨던 게 기억나서 출산 후 아이 돌봄 서비스부터 신청해 놨다.


9월부터 시작되는 4학년 2학기 시간표를 최대한 몰아서 학교 가는 일정을 최대한 줄였다. X는 연애당시 휴학 중이었고 결혼하면서 휴학을 연장했다. 백화점에서 근무하며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아이를 돌보며 육아를 함께 했다. 의지할 사람이 서로뿐이었다. 종종 친정에 잠깐 아이를 맡기고 수업 끝나면 부산 집으로 이동하고 친정에서 아이 봐줄 시간이 안되면 돌봄 선생님 신청하고 학교를 다녀오고 그렇게 졸업시험, 졸업연주를 무사히 마쳤다.


난 22살 어린 엄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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