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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공무원인데 영어, 필요하나요

외국인 민원인이 찾아왔다!

by 이진영

“여기 1층 카운터인데요, 영어 쓰는 외국인이 찾아왔는데 약국 민원 넣으러 온 것 같아요. 약무팀으로 찾아가라고 할게요.”

보건소 1층에는 관문, 카운터가 있다. 여기 근무하시는 분들은 찾아오는 민원인들이 어떤 목적으로 왔는지 이야기를 들어드린 후에 갈 곳을 알려드리는 일을 한다. 뵐 때마다 힘든 일을 하시는구나 싶어 늘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었는데 저 말을 듣는 순간 그동안의 감사한 마음이 싹 달아나 버렸다.


“무슨 일이라고 하셔요?”

“우리말을 하나도 못 해서 자세히는 몰라요.”

힌트도 없고 야속하기만 했다. 두근대는 마음으로 사무실 문이 열리길 기다렸다. 그날따라 언제나 든든한 팀장님도 자리에 안 계셨다. 혹시 마음이 변해서 안 오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무렵, 한 백인 남자가 들어왔다.

출처: 픽사베이


“(영어).....(영어).... Pharmacy... Drug... Emergency,,,, No Effect....(영어).”

Pharmacy가 들리는 순간 약무팀 담당자들만 남고 다른 팀 직원들은 모두 각자 자리로 돌아갔다. 이것이 바로 업무 분장의 힘이다. 솔직히 나도 내 업무가 아니다 싶었으면 그렇게 행동했을 테니까.

완벽하진 않아도 추측한 내용인즉, 자신이 너무 아파서 응급실에 갔는데 거기 약국에서 지어준 진통제가 아무래도 가짜 같다는 것이다. 효과가 없다는 이야기 인지, 자신과 안 맞다는 내용인지 횡설수설해서 우리말로 들어도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라고 물어야 할 판이었다. 약 봉투를 보여 달라고 하니 지금은 없다며 했던 말을 계속 반복했다. 게다가 그 외국인은 자기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며 답답해했다.

“(영어) 너 번역기 없어? 내 말을 한국어로 바꿔.”

듣던 나도 답답해서 종이와 펜을 가져왔다. 그리고 당신이 말하는 그 약국의 이름을 써보라고 했다.


‘□□ University Hospital Pharmacy’

□□ 대학병원은 우리 지역 소속이 아니었다. Pharmacy와 Drug를 듣자마자 썰물처럼 빠져나간 다른 팀 사람들과 나는 같은 마음을 가질 수 있었다. 부담감에서 벗어나니 당당해졌고 영어도 술술 나왔다.

“The hospital is located in OOO. You should go to OOO public health care center. We cannot do anything to that hospital.”

그 병원은 OOO 지역에 있어. 넌 OOO 보건소를 찾아가야 해. 우리는 그 병원에 대해 아무 조치도 할 수 없어. (정확히는 조사 권한이 없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영어가 거기까지 미치지 못했다.)


대략의 지도를 그려서 지금 위치, □□ 대학병원이 속한 지역의 위치를 표시하며 그 지역으로 가라고 알려주었다. 외국인은 오케이를 연신 외치며 사무실을 바로 떠났다. 그가 나간 즉시 나는 OOO 보건소 약무팀에서 근무하는 동기에게 전화했다. 여기를 방문한 외국인이 그쪽 지역 병원 약국에 민원을 넣고 싶어 해서 그리로 보냈으니, 그가 도착하면 당황하지 말라고 귀띔해 주었다.


보건소로 찾아오는 외국인은 그 외에도 여러 명 있었다. 대부분 의료기기판매업 신고를 하기 위해서 방문하는 사업자로, 국적은 중국, 일본이 가장 많았고 간혹 동유럽권 나라 사람도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사업을 하는 만큼 한국어가 능숙한 사람도 있었고, 한국인에게 권한을 위임하여 대리인을 보내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우리말을 전혀 못 하는 외국인 민원인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영화 ‘영어 완전 정복(2003)’에서 동사무소 말단 공무원 나영주(배우 이나영)는 갑자기 찾아온 외국인의 민원을 처리하지 못해 당황한다. 그리고 부서 대표로 ‘영어 완전 정복 주자’로 당첨되어 강제로 영어학원을 다니게 된다. 상상 속에서 나영주는 ‘나는 조선의 9급 공무원이다!’를 외치며 현실을 부정한다. 나 또한 대한민국 공무원으로서, 그 외국인 민원인을 떠올리면 “당신은 번역기가 없소? 내 말을 당신네 나라말로 바꾸시오. 난 이제부터 한국어로 말하겠소. 여기는 대한민국 관공서요!”라고 그때 외칠 걸 그랬다 싶기도 하다.


국가직 공무원으로 일할 때를 돌이켜보니, 업무에 있어 영어 실력이 필요했던 순간들이 기억난다. 실험 업무를 할 때 미국약전, 유럽약전, 영어로 된 일본약전을 봐야 했던 경우도 있었고, 심사 업무를 할 때는 제약회사가 영어로 된 자료를 제출하기도 했다. 국제회의나 외국 학회, 교육에 참여할 기회가 생기기도 했는데 그때 영어 부담이 없었다면 조금은 그 순간을 즐기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남는다.


대한민국의 위상이 올라갈수록 국가기관과 관공서를 찾는 외국인들도 증가할 것이다. 결국 대한민국 공무원이 어느 정도 수준의 영어를 할 수 있으면 좀 더 소통하기 편리하지 않을까. 그리고 영어를 잘하면 의외의 상황에서 성장 기회를 포착할 수 있을 것이다. 여러 아쉬웠던 경험을 바탕으로, 나는 현재 주 3회 전화 영어 수업을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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