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의 약사님을 배웅하며
“그 약국 확인해 보세요. 약사가 있는지 모르겠는데 약이 지어져 나오더라니까.”
신고를 받고 든든한 약무팀장님과 함께 2인 1조로 약국 점검을 나섰다. 약국 인근에 도착했을 때 마침, 처방전을 들고 약국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있었다. 약국 안을 슬쩍 들여다보면서 상황을 살피다가 처방전을 접수했던 종업원이 약국 한 편의 조제실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순간 우리는 약국 안을 급습했다.
“보건소에서 왔습니다. 조제실 안에 지금 누가 계신가요?”
당황할 줄 알았던 종업원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조제실 내부를 향해 외쳤다.
“약사님! 보건소에서 오셨어요. 나와 보세요.”
작은 약국 안쪽에는 생각보다 넓은 조제실이 있었고 80대 중반으로 보이는 고령의 약사님이 천천히 나오셨다. 걸음걸이는 빠르지 않으셨고 귀는 살짝 어두우신 듯 보였다.
“보건소?”
“네, 약사님. 저희는 보건소 약무팀에서 왔어요. 근무시간은 어떻게 되세요?”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그 이상은 힘들어서.”
“중간에 자리 비우실 때는 없나요?”
“걷기 불편해서 출근하면 약국 문 닫을 때까지 한자리에만 쭉 있어요. 환자가 뭐 물어보면 일어서는데.”
“약사님, 지금처럼 약과 함께 복약안내문을 드릴 수도 있지만 되도록 일어서서 모습을 직접 보여주세요. 약사님이 약국에 안 계신 것처럼 보여요. 방금 저희도 그런 오해를 했어요.”
“네, 알겠어요. 번거롭게 해서 죄송합니다.”
그밖에 여러 가지 점검을 마친 후 떠나는 우리에게, 고령의 약사님은 인자한 미소를 보이며 손을 흔들어 배웅하셨다. 점검 나온 감시원에게 손을 흔들어 주신 분을 처음 봐서, 그 천진난만한 행동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까마득한 후배 약사를 보는 따뜻한 눈빛과 그 손짓은 잔잔한 기억으로 남았다.
“약국 폐업 신고 절차를 알 수 있을까요?”
몇 달 후, 그 약국에서 뵈었던 종업원한테서 전화가 왔다. 이제 약사님 연세도 많고 건강도 예전과 같지 않으셔서 은퇴하시는 게 좋겠다는, 자녀들의 설득이 있었다고 했다. 종업원조차 이제 쉬고 싶다고 선언한 결과 연말까지만 운영하고 약국 문을 닫을 예정이라고 했다. 폐업에 필요한 절차를 알려드렸고 그해 말, 따님의 부축을 받으면서 고령의 약사님은 약국 폐업 신고를 하러 보건소에 방문하셨다.
약국 폐업 신고의 마지막 절차는 그간 약국에 걸어 두었던 약국개설등록증을 보건소로 반납하는 것이다. 거의 50년이 다 된, 나보다 나이가 많은 등록증을 보는 순간 먹먹해졌다. 지금과 다른 양식의 등록증은 원래 그런 색이었는지 세월 탓인지 알 수 없도록 누렇게 바래어 있었다. 등록증 안에 적혀있는 수기 기록은, 한 자리를 묵묵히 지킨 약국의 역사 그 자체였다. 이를 본 동행한 따님분이 뒤돌아서서 눈물을 훔쳤다. 더 이상 효력이 없는, 반납된 약국개설등록증 앞 장을 복사해서 기념으로 가져가시라며 따님분께 드렸다. 약사님을 배웅하며 약무팀 전원은, 그간 우리 지역에서 긴 시간 자리를 지켜주셔서 감사하다며 정중히 인사드렸다.
어느 분야이든 한 자리를 오랫동안 지키는 것은 쉽지 않다. 자영업자는 월세 등 고정비 지출이 버겁고, 직장인은 평생직장에 대한 믿음이 사라졌다. 이 현상은 약국도 마찬가지다. 한 자리를 오래 지키기는 약국보다는 6개월, 1년 단위로 개설 약사가 바뀌거나 약국 위치를 이전하는 경우를 흔하게 봤다. 약국에 고용되어 일하는 관리약사의 이직 주기도 빠르다. 오랫동안 공직에만 있었던 나는 이런 세태가 낯설고 가끔은 혼란함도 느낀다.
시간이 지나 내가 공직약사를 은퇴하는 그날이 오면, 무슨 일을 하면 좋을까 틈틈이 생각한다. 처음에는 여행도 다니고 그간 배우지 못한 것들을 마음껏 배우는데 시간을 쓰겠지만, 결국은 소소한 일이라도 찾지 않을까. 그때가 오면, 가능한 한 자리에 정착해서 오랫동안 자리를 지키는 일을 하고 싶다. 그곳에 가면 만날 수 있는 한결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그래서 마침내 모든 일을 내려놓을 때, 긴 시간 자리를 지켜주어 감사하다는 인사를 받으며 떠나고 싶다. 그날 뵈었던 고령의 약사님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