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들을 싫어하는 유치원 선생님께

by E Hana

“너랑 평생 안 놀 거야. 내가 소리 질렀어.” 그게 무슨 뜻인지 알고 있냐고 물었습니다. “선생님이 친구들이 나랑 평생 안 놀 수도 있다고 그랬어.” 집에 와서 이야기하는데, 적잖이 속상했을 아들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화가 난다고 친구에게 아무 말 대잔치를 해서는 안 되겠지만 일단은 왜 화가 났는지 물어봐야 할 것 같았습니다.


“친구들끼리 화가 나면 미운 말도 할 수 있지..” 하지만 화를 참지 못하고 친구들이 모두 자신의 감정을 쏟아내면 유치원은 짜증 나고 답답하고 슬픈 공간이 될 거라고 말했습니다. 엄마는 아들이 친구들을 좋아하는 만큼 친구들과 사이좋게 즐겁게 지냈으면 좋겠다고 말입니다.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매번 생각하는데 자꾸만 까먹어. 그래서 속상해.” “그랬겠다..”


“이제 그만 일러. 다 보고 있어.” “선생님이 내가 얘기하려고 했는데 그만 말하래. 내 얘기를 들어주지 않아.” 다른 친구들이 아들에 대해 이르는 건 들어주는데 자신의 억울함에는 귀를 닫아버린다고 말했습니다. 결국 자신만 혼이 났다고요. 아이들에게 선생님이라는 존재는 절대적입니다. 그렇기에 선생님의 단호함은 때로 거절로 받아들여지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단호함과 냉정함은 한 끗 차이니까요. “선생님은 나야.” 선생님이 선생님이라는 걸 모르는 아이들은 없습니다. 그런데, 선생님=나라는 말이 왜 이렇게 권위적으로 느껴질까요?


“내가 미안하다고 사과했는데, 친구가 선생님한테 이르니까 ‘미안해’가 다가 아니라고 그랬어.” 아들이 뭐라고 했어야 선생님께 정답이었을까요? 아들이 잘못을 했다면, 잘못된 행동에 대해서 상황에 맞는 행동으로 교정해 주었으면 좋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과를 한 아들에게 사과가 전부가 아니라는 건 무슨 뜻이었을까요? 비난과 경고를 한꺼번에 받은 느낌이랄까요. 미운털이 박혔으니 억울해도 어쩔 수 없다는 마음이 들었을 테지요.


아들이 다니는 열매반의 역할영역은 욕망의 공간이 되었습니다. 아들에게 전해 들은 이곳은 몇 명 아이들만의 전유 공간이었습니다. 그 아이들끼리 놀이 순서를 정하고 편을 가르다 보니 친하지 않은 아이들은 자연스레 다른 놀이영역으로 밀려났습니다. 아들은 자신도 이곳에서 놀고 싶었기에 불만이 쌓였을 겁니다. 그러다 보니 유난히 이 아이들과 실랑이를 벌이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아들이 화를 낸다고 선생님은 두 번이나 놀았으니 이제 역할영역에서는 그만 놀라고 하셨습니다.


‘두 번의 다툼’이 ‘두 번의 놀이’로 바뀌었다는 걸 아들은 알았는데 선생님은 정말 몰랐을까요? 아들의 행동이 모두 옳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선생님이 역할영역 안에서 일어나는 아이들의 미묘한 갈등을 알아채지 못한 데 대해 몹시 섭섭했습니다. 정말 몰랐거나, 아니면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거나 말입니다. 친구들끼리 편을 가르고 조종하는 행동을 아들에게 전해 듣고 그냥 넘길 수는 없었기에 선생님께 편지를 썼는데, 이 일이 ‘저에 대한 원망’에서 ‘아들에 대한 미움’으로 옮겨가리라는 걸 짐작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너 나한테 말로 하면 3대, 이렇게 하면 5대, 막 이렇게 까불면 10대, 너 몇 대 맞을래?” “친구끼리 싸우고 때리는 거 싫어..” 하지만, 제 아들은 발로 차이고 무릎으로 눌리고 엎드린 채로 친구에게 밟혀야 했습니다. 아들에게 이 얘기를 듣고는 충격을 받아 유치원에 며칠 안 보냈더니 선생님께서 직접 전화를 하셨습니다. 본 사람이 아무도 없고 둘 사이에서 일어난 일이라 정확한 진실을 알 수 없다고요. 상대 아이 부모도 이야기를 듣고 많이 놀란 상태라면서 아들을 다시 유치원에 보내면 사과를 받게 하겠다고요.


진실을 알 수 없다는 선생님의 변명도 불편했고, 제삼자의 위치에서 재판을 하는듯한 선생님의 말투도 부담스러웠고, 유치원에 왜 선생님 없이 아이들만 있었는지도 이해되지 않았지만, 직접 사과를 받는 경험은 중요할 것 같아 아들을 달래어 유치원에 다시 보냈습니다. 그런데, 두 아이를 화해를 시킨다면서 하루 종일 손을 붙잡고 다니라고 하셨다고요? 화장실에 갈 때조차 손을 잡고 가라고 했다며 유치원에서 돌아온 아들은 결국 눈물을 보였습니다.


선생님이 말하는 학령기는 공부보다 '사회성의 확장기'라고 생각합니다. 여러 연령층과 다양한 경험을 하는 건 아이들의 살아있는 사회성 교과서가 됩니다. 부모가 집에서 절대 교육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경험의 성공과 실패를 통해 아이들은 사회적 태도나 기술들을 배웁니다. 하지만, 친구 관계의 어려움이 반복되면 자아상도 부정적으로 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되도록 성공적인 관계를 맺도록 도우며 갈등을 통해 아이의 사회적 문제들을 평가하고 점검하게 도와야 할 것입니다. 이 몫이 바로 선생님의 역할영역이 아닌가 싶습니다.


영화 <아이엠쌤>에서, 쌤은 위탁가정을 탈출해 밤마다 찾아오는 딸아이를 안고 위탁가정으로 다시 데려다주며 말합니다. 아이가 밤에 잠을 못 자면 배를 두 번 문질러주거나, 노래를 두 곡 불러주거나, 좋아하는 빵 반쪽을 먹이라고요. 하지만 위탁모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내가 알아서 하겠다’고. 선생님도 선생님이 선생님인지라 일개 학부모가 드리는 말씀이 많이 불편하셨겠지요. 아이들 교육에 대해서는 본인도 학사, 석사까지 배울 만큼 배운 사람이라고 피력하던 마스크에 가려진 선생님의 서늘한 눈빛을 기억합니다.


한 번은 선생님이 제 아들을 혼낼 때, 옆에서 보던 친구가 “윤이가 잘못한 게 아니에요, 선생님” 했다고요. 7살 아이가 어른보다 낫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 아들은 4학년이 된 지금도 그 친구를 세상에서 제일 고마운 친구라고 얘기합니다. 선생님은 요즘도 어딘가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계십니까?


“선생님, 윤이는 오늘 안 혼나요?” “나는 쟤 생각도 하기 싫어.” 유치원의 졸업이 코 앞이라 선생님도 이젠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지기로 하셨나 봅니다. “엄마, 세상엔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있어.” 제 아들도 선생님을 포기한 듯 말합니다. 아이 하나를 키우는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을 믿습니다. 선생님도 교사로서의 신념을 가지고 아이들을 대하고 가르친다고 믿고 싶습니다. 다만, 강인하고 올곧음 속에서 유연함을 잃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즐겁고 좋았던 일들 다 빼고 속상했던 일만 잔뜩 전해 마음이 못내 무겁습니다. 다만 아이를 아끼고 사랑하는 엄마의 마음으로 헤아려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윤이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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