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결정 기준 재정의 | 무엇을 하지 않을 것인가
새해의 시작,
신학기의 시작,
새 일의 시작.
모든 '처음'은
무엇을 할 것인가를 다짐한다.
그런데 나는 '결심'이라는 말을 오래 믿지 않았다.
후회 뒤에 따라오는 거창한 선언들.
"이제 바꿔야지."
"이제 다르게 살아야지."
그 말은 진심이었다.
오래 가지 않았을 뿐.
'하겠다'도, '하지 않겠다'도
결국 작심삼일의 문장이었으니까.
그래서 이번에는
결심이라는 말 대신,
기준을 바꾸는 이야기를 하려 한다.
무엇을 더 할지가 아니라,
무엇을 하지 않을지를 정하는 것으로.
어쩌면 이번 이야기는
내가 미움받을 준비를 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유지해 온 '나'를
조금은 내려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반응을 멈추지 않는 사람이었다.
나는 전부 처리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부탁을 거절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 덕에 살아남았고,
그 덕에 인정받았다.
(그리고 그것이 나의 능력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잘해온 방식이 나를 계속 그 자리에 묶어두고 있었던 건 아닐까.
강점이라 믿었던 것들이 사실은 구조를 고착시키는 장치였던 건 아닐까.
속도를 줄이겠다고 말하면서
여전히 누가 앞질러 가는지를 눈으로 좇고 있었던 것처럼.
왜 바꾸지 못했냐고 묻는다면,
달리고 있을 때는 적어도 내가 가고 있다고 착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확인 없는 속도가 오만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래서 이번에는
'더 잘하겠다'가 아니라
'그만 잘하겠다'에 가깝다.
모든 요청에 끝까지 책임지지 않겠다.
'좋은 사람'으로 남기 위해 무리하지 않겠다.
구조를 바꾸지 않은 채 더 열심히 하지 않겠다.
성과가 난다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붙잡지 않겠다.
'바쁘다'는 상태를 능력으로 착각하지 않겠다.
나는 내 강점을
같은 방식으로 쓰지 않기로 했다.
나는
가성비였고,
잡부였고,
핸들 없이 달리는 실무자였다.
그리고 그것들이 전부
'대체되지 않으려는 두려움'에서 나왔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그러나 대체되지 않으려고 살다 보니,
'나'를 대체해버렸다.
일이 나를 대신했고,
반응이 나를 대신했고,
평판이 나를 대신했다.
나는 여전히 '일 잘하는 사람'이었지만
내 삶을 설계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이걸 성실함이라 믿었으니, 꽤 오래 속은 셈이다.)
To-do-list는 익숙하다.
늘 채워 넣어야 할 것들이 있었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Not-to-do-list다.
할 수 있다는 것과
해야 한다는 것은 다른 문제이니까.
잘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맡지 않겠다는 것,
그게 이 목록의 첫 번째 원칙이다.
아직 목록이 완성되지는 않았다.
이후 몇 화가 그 작업이 될 것이다.
지난 몇 편 동안
나는 나를 진단했고, 계산했고, 정산했다.
이제는 방향을 바꿀 차례다.
지금 이 결심은
무언가를 시작하는 다짐이 아니다.
조금은 덜 바쁜 사람이 되겠다는 선택이다.
조금은 덜 편리한 사람이 되겠다는 선택이다.
조금은 덜 쓰기 좋은 사람이 되겠다는 선택이다.
하지 않기로 한 것들이 쌓여야
비로소 내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이번에도 삼일이면 웃기겠지.
그런데 적어두지 않으면, 아무 일도 없었던 척할지도 모르니까.)
다음 화
11화. 연장을 내려놓고 잡은 지휘봉 | 포지셔닝 전략 | 한 사람의 좌표 재설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