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점과 리스크 평가 | '일 잘하는 나'를 위해 치른 건강과 비용
나는 각종 청구서가 싫다.
금액 때문은 아니다.
내가 쓴 돈이라는 걸 모를 만큼 무책임하게 살지는 않았다.
그래도 달갑지 않다.
청구서는 ‘이미 끝난 선택’에 대해
뒤늦게 책임을 묻는 종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난 내 삶에도, 청구서가 있었다.
한동안은 잘 몰랐다.
나이를 먹어서 그렇겠거니 했다.
운동을 안 해서 그렇겠거니 했다.
일은 재밌었고, 돈은 벌렸고,
나는 여전히 “일 잘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이 세 문장은
그 시절의 나에게 완벽한 면죄부였다.
몸은 나중에 챙기면 되는 문제였고,
지금의 속도와 성과 앞에서는
항상 우선순위에서 밀렸다.
늘 장점만 봤다.
대가는 계산하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날,
발신자 이름 없는 도착한 청구서를 받았다.
스트레스 검사 결과지였다.
결과지를 한참 들여다보던 의사가 말했다.
“이 그래프 보이죠. 이런 그래프 양상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어요.
전쟁에서 복귀한 군인들에게서 나타나는 증상이에요.”
그리고 덧붙였다.
“전쟁통에서 사시는 것 같네요.”
그래프는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끝에 붙어 있었다.
나는 전쟁을 한 적이 없었지만 몸은 이미 전시 상태였고,
나는 그걸 ‘집중력’이라고 여겼다.
그때부터 정산 내역이 보이기 시작했다.
떨어진 체력.
무너진 수면의 질.
항상 과열 상태인 예민한 신경.
술로 밀어 넣은 스트레스.
완전히 망가진 위장과 간.
비타민 D 수치 ‘0’.
저혈당.
면역력 저하.
등
이건 병명이 아니라
정산 내역이었다.
가성비는 외부의 평가였고,
원가는 내부에서 깎이고 있었다.(가성비는 개뿔. 거저다, 공짜였다.)
병원 출입이 잦아졌고,
통증은 여기저기서 나타났고,
몸의 리듬은 돌아오지 않았다.
밤에는 긴장이 풀리지 않았고,
아침이 되면 몸은 다시 전시 체제로 복귀하기를 거부했다.
“언젠가 쉬면 되겠지.”
“몰아서 며칠 쉬면 괜찮아지겠지.”
괜찮기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회복되지 않는다는 건,
애초에 회복을 전제로 설계된 것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간, 위, 수면, 면역력.
하나씩.
병원비는
열정의 부가세였다.
두 번째로 청구된 건 관계였다.
나는 늘 바빴다.
늘 최선을 다했다고 믿었다.
늘 좋은 사람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쓰지 못한 시간의 비용을
누군가 대신 내고 있었던 건 아닐까.
어머니가 아프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조금만 덜 일했다면?
조금만 덜 버텼다면?
조금만 더 신경 썼다면?
아마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몰랐다”는 변명은 남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혼자 버틴다고 생각했다.
실은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청구서를 돌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관계는
남는 시간으로 유지되는 게 아니었다.
시간을 갖지 않으면
관계도 갖지 못한다.
그 비용은 카드 명세서에 찍히지 않는다.
대신 표정에 남았다.
말끝에 남았다.
답이 돌아오지 않는 침묵에 남았다.
“오늘도 많이 바쁘니…?”
그 문장은 질문이 아니라
확인에 가까웠다.
나는 늘 “응, 조금만 더.”라고 답했고
그 ‘조금’은 십수 년이 되었다.
세 번째는 시간이었다.
많이 일했지만 남지 않은 시간.
자산으로 축적되지 않은 노력.
시간을 쓴다는 건
어딘가에 쌓이거나,
다음 선택의 여지를 넓히거나,
적어도 반복을 줄이는 방향으로 남아야 한다.
그래야 투자다.
그런데 내 시간은
그날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서 끝났다.
해결은 했지만
구조는 그대로였고,
내일도 같은 문제가 돌아왔다.
나는 매번 잘 처리했고,
그래서 매번 다시 불렸다.
능숙함이
나를 자유롭게 하지 못했다.
오히려
더 바쁘게 만들었다.
붕괴된 구조 위에서
남의 편의에 맞춰 쓰이며
내 욕심으로 쌓았다고 믿었던 자산을
조용히 퍼주고 있었다.
성과는 있었지만,
재사용 가능한 시스템은 거의 남지 않았다.
파일은 남았지만,
구조는 거의 남지 않았다.
평판은 쌓였지만,
레버리지는 생기지 않았다.
‘일 잘하는 나’를 유지하기 위해
나는 늘 즉각 반응했고, 그 반응 속도만큼 내 시간은
장기적인 축적에서 멀어졌다.
시간은 썼지만,
자산으로 전환되지 않았다.
남은 건
피로와 평판뿐이었다.
평판은 남았지만
내 구조는 달라지지 않았다.
이 청구서는
어느 날 갑자기 온 게 아니다.
나는 알고 있었다.
조금씩 무너지고 있다는 걸.
다만 계산하지 않았다.
계산하지 않으면
없는 일처럼 느껴졌으니까.
하지만 비용은
기록되지 않아도
사라지지 않았다.
강점은 분명 있었다.
나는 나름 잘했다.
나름 성과도 냈다.
문제는
그 강점을 유지하는 방식이었다.
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이 청구서는 계속 발급된다.
나는 전쟁을 한 적이 없다.
그런데도
복귀한 군인의 그래프를 받았다.
그게
내 삶의 정산서였다.
몸은 깎였고,
관계는 밀렸고,
시간은 쌓이지 않았다.
나는 잘해냈지만,
제대로 남긴 것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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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하지 않을 결심 | 의사결정 기준 재정의 | 무엇을 하지 않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