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관계자 재정비 | 진짜 VIP의 선별
몇 년 전 유행처럼 번지는 MBTI 검사를 다시 해봤다.
결과는 E였다. 외향. 어딘가 이상했지만 굳이 따질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고, 또 그러려니 했다. 나는 원래 그런 식으로 넘어가는 사람이다. 검사 결과가 그렇다는데 굳이 따질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그다지 내게 중요한 것은 아니니까.
그런데 묘하게 마음이 불편했다. 결과지를 보면서도 이게 맞는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맞는 말 같기는 한데, 어딘가 내 몸에 딱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느낌이었다. 그 순간, 예전에 회사에서 두꺼운 검사지를 받아 몇 시간을 풀고, 몇 주 뒤 결과를 받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는 I로 시작했다. 정확한 유형은 기억나지 않지만, 지금처럼 E는 아니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인터넷 검사는 간소화된 방식이라 결과가 다를 수 있다고 한다.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붙잡은 건 유형의 정확성이 아니라, 그 결과를 받아들이는 나의 감정이었다. 왜 이렇게 어색할까.
최근 몇 번의 약속이 있었다. 모임이 있었고, 사람들을 만났다. 외향형은 사람을 만나며 에너지를 얻는다고 한다. 내 짝꿍은 그런 사람이다. 모임에서 돌아오면 오히려 활기를 띤다. 오늘 들은 이야기와 떠오른 생각을 정리하며 더 선명해지고, 그 자리에서 얻은 인사이트를 확장해 새로운 것을 찾는다.
나는 다르다. 사람들을 만나고 집에 돌아오면, 마치 배터리가 급격히 닳은 전자기기처럼 조용히 꺼져간다. 몸이 힘든 것과는 조금 다르다. 머리가 비어버린 느낌, 더 이상 어떤 판단도 하고 싶지 않은 상태에 가까웠다. 예전에도 그랬다. 약속이 끝나고 돌아오면 나는 더 이상 집중하지 못했고, 무언가를 이어서 하겠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쉬다가, 늘어지다가, 결국 잠들었다. 그동안은 단순히 피곤해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짝꿍을 보며 생각이 달라졌다. 같은 시간을 보내고도 왜 우리는 이렇게 다른 반응을 보일까. 나는 얼마 전 짝꿍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 “뇌 에너지도 총량이 있다더라.” 심리학에서 말하는 에고 디플리션 이론은 자기통제력과 의사결정 능력이 한정된 자원처럼 소모된다고 설명한다. 하루 동안 정신적 노력이 누적되면 인내가 줄어들고, 감정 조절이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이 이론을 접하고 나는 묘하게 안심했다. 나는 게으른 것이 아니라, 이미 소진된 상태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내가 그 소진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나는 오랫동안 인하우스 디자이너였고, 프리랜서였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결하는 중간 관리자 역할을 했다. 회의를 조율하고, 갈등을 중재하고, 이해관계를 맞추는 일이 일상이었다. 그것은 필요였고, 업무적 역할이었다. 나는 그 역할을 수행하며 스스로를 ‘다리’라고 여겼고, 사람을 많이 만나는 것이 곧 나의 성향이라고 믿었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조금 다르게 보인다. 나는 사람을 만나며 살아왔지만, 사람을 만나며 회복한 적은 없었다. 만남은 즐거웠지만 동시에 긴장이었고, 대화는 유쾌했지만 늘 계산과 조율이 함께 있었다. 나는 말의 톤을 고르고, 상대의 표정을 읽고, 분위기를 정리하며 늘 어느 정도의 긴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시간은 휴식이 아니라 또 다른 노동에 가까웠다.
그 사실을 인정하자 하나가 선명해졌다. 내가 잘못된 사람이 아니라, 에너지의 배치가 잘못되어 있었다는 것.
가족과 함께 있는 시간은 달랐다. 조용히 밥을 먹고, 별말 없이 하루를 나누고, 같은 공간에 앉아 각자의 일을 하는 시간 속에서 나는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안정됐다. 이 차이를 인정하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관계의 VIP를 다시 정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나는 모두를 VIP로 두는 구조로 살았다. 연락이 오면 응했고, 요청이 오면 고민했고, 기회라면 붙잡았다. 일과 사람이 분리되지 않았고, ‘일 = 나’라는 등식이 너무 자연스러웠다. 모두를 VIP로 두는 순간, 아무도 VIP가 아니게 된다. 에너지는 흩어지고, 중심은 사라진다.
그래서 모두를 우선에 두는 방식을 멈추기로 했다. 가족, 소수의 친구, 그리고 나 자신. 이 범위를 벗어난 관계는 소중하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라, 우선순위의 재정렬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관계의 VIP를 선별한다는 것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에너지 배치의 문제였다.
관계만이 아니었다.
일도 마찬가지였다. 언제부턴가 나는 결정을 앞에 두고 자꾸 더 알아보려 했다. 더 많이 알수록 더 정교해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반대였다. 생각이 길어질수록 실행은 멀어졌고, 가능성은 늘어났지만 방향은 흐려졌다. 결국 나는 더 잘 아는 사람이 아니라, 결정이 늦는 사람이 되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결정을 기다리지 않는다. 대신 결단하고 움직인다.
그래서 앞으로는 고민의 양이 아니라, 고민이 흘러가는 방향을 기준으로 삼기로 했다. 생각할수록 다음 행동이 선명해지면 실행한다. 생각할수록 부담이 줄어들고 구조가 단순해지면 실행한다. 반대로 생각할수록 변수가 늘어나고 통제할 수 없는 요소가 많아진다면 멈춘다. 실행이 아니라 준비만 반복된다면 중단한다.
사업에는 정답이 없다. 완벽한 판단을 찾기보다, 책임질 선택을 한다. 틀리면 고치고, 부족하면 보완한다.
일의 VIP를 선별한다는 것도 같은 말이다. 모든 기회를 붙잡지 않는다. 지금 나를 앞으로 움직이게 하는 일만 남기고, 나를 소모시키는 일은 내려놓는다.
이 두 가지 기준은 결국 단위의 전환으로 이어진다. 나는 그동안 ‘나의 성공’을 기준으로 움직였다.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더 많은 기회를 붙잡고, 더 많은 가능성을 확보하는 것이 성장이라고 믿었다.
이제 기준을 바꾼다. 나의 성공이 아니라, 우리의 지속을 본다. 가족과 함께 오래 살아갈 수 있는 구조, 나의 에너지가 고갈되지 않는 방식, 일과 삶이 서로를 잠식하지 않는 배치.
VIP를 다시 정했다. 그 기준에 맞게 나의 시간과 에너지를 재설계하기로 했다.
이건 감정적인 결심이 아니다. 함께 오래 살기 위해 구조를 바꾸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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