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지나가버린 것 그리움이 되리니

by 도토리

매주 월요일, 학주 선생님은 자를 들고 교실을 돌았다. 선도부의 발소리, 옆반에서 들리던 억울한 비명, 킥킥거리는 아이들의 숨죽인 웃음, 창밖의 폐가전 수거차 소리까지. 내 90년대의 기억은 이상하게도 전부 ‘소리’로 남아 있다. 귀밑 4cm 단발과 무릎까지 내려오던 치마 길이, 그 시대의 냄새와 공기를 온몸에 달고 살던 중학생이었다.

그 시절, 나는 한 편의 시를 붙들고 살았다. 설거지를 할 때도 주방 창에 붙여두고 중얼거렸던, 나만의 ‘인생 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 푸시킨>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 말라
힘든 날을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사니 현재는 항상 어두운 것
모든 것 한순간에 사라지고
지나가 버린 것, 그리움이 되리니



그땐 매일이 버거웠다.
아버지는 매일 술에 취해 있었고, 이혼의 책임은 늘 내게로 향했다. 술만 드시면 새어머니에게 날아가던 주먹으로 인해 나는 결국 그의 이혼 재판에 탄원서를 냈다. 그러면서도 이혼이 끝나고 내가 갈 곳이 어딘지 생각하지 못했다. 냉혹하게도, 나는 다시 그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이혼이 마무리되던 날, 새어머니는 집 비밀번호를 바꾸었다. 아무리 눌러도 열리지 않던 그 도어록이 너무나 서럽고 원망스러웠지만, 지금은 안다. 그녀도 자기 삶을 지키려 안간힘을 썼을 뿐이라는 것을.
그래서 나는 다시 아버지에게 돌아갔다. 유난히 눈이 많이 오던 날, 발가락이 얼어 견딜 수 없이 간지러웠던 그 감각만 또렷하다. 이상하게도 그런 장면만 오래 남는다.

심하게 뺨을 맞아 바닥을 기어 안경을 찾던 날도, 낯선 여자들이 집을 드나들던 날도, 나는 푸시킨으로 버텼다. 마음은 미래로 향한다 했으니, 이 지옥 같은 현재도 언젠가는 지나가리라 믿으면서.


그러나 동시에 나는 나 자신을 지독하게 괴롭혔다.
기형도의 시처럼, 평생 사랑을 찾아 헤매면서도 정작 나 자신을 단 한 번도 사랑하지 않았다. 젊은 날의 뜨거운 불덩이들이 매일같이 나를 태워댔다.

내가 사랑한 시인들은 하나같이 짧은 생을 살았다. 푸시킨도, 기형도도, 윤동주도. 그들을 보며 나도 단명을 꿈꾸었다. 살아갈 이유를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곳, 거대한 파도가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현재의 자리를 벗어나 갈 수 있는 평온한 공간. 세상도, 부모도 나를 사랑하지 않았으니 누가 나를 사랑하겠냐는 생각이 내 마음을 좀먹었다.


성인이 되어서도 삶에 대한 의지는 크지 않았다. 그저 집에서 가장 먼 국립대를 골라 도망치듯 떠났다. 그제야 조금의 평화를 찾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전혀 다른 사람을 만났다. 술도 못 마시고, 담배도 모르는, 연애 경험도 거의 없는 사람. 나는 아마 평생 그런 사람을 찾고 있었던 것 같다. 서툴지만 우리의 힘으로 그와 결혼했고, 따뜻한 집이 생겼고,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아이가 생겼다.


그리고 나는, 정말로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아이를 키우며 다시 읽는 푸시킨은 이제 ‘참아내는’ 시가 아니라 ‘지나가버린 것들에 대한 아쉬움’의 시가 되어 있었다. 너무도 못난 나는 다정하게 말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고, 사랑을 주는 법도 늦게서야 깨달았다.


아이의 작은 실수에도 화를 내던 날들. 놀아달라는 아이에게 “다음에, 주말에.” 하며 눈을 피하던 순간들. 과거의 서운함까지 끌어와 잔소리를 쏟아냈던 날들. 그리고 순간적인 화에 손이 먼저 나갔던 그날.


그 모든 시간이 지금은 견딜 수 없을 만큼 그리움과 후회로 남아 있다.


왜 그렇게 빨리 걷기를 바라던 걸까.
왜 그렇게 빨리 유치원에 보내 내가 쉴 시간을 확보하려 했을까.
밤낮없이 매달리는 아이를 보며 왜 그토록 격렬한 미움을 느꼈을까.


마음이 늘 미래로 향했으니, 현재가 행복할 리 없었다.
아이에게 부모는 첫사랑이라는데, 나는 그 첫사랑의 환상을 지켜줬을까. 솔직히, 아니었다. 이상하게도 부모가 되고 나니, 잘해준 기억보다 울렸던 기억만 자꾸 떠오른다.


그렇게 애달프고 귀한 아이를 바라보다 문득 오래 전의 내가 겹쳐 보였다. 아이가 한 해 한 해 자랄수록 생각하게 된다. 어찌 7살 아이에게, 어찌 8살 아이에게, 나는 고작 그 나이었는데, 아버지는 나에게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그러면서도 또 생각한다. 어쩌면 아버지도, 그 시대의 어른들도 다 자기 삶을 감당하기 버거워 몸부림쳤던 건 아닐까. 나는 여전히, 어쩌면 영원히 그의 방식을 이해할 수 없겠지만, 그 또한 괴로웠을 거라는 것을 이제는 조금 안다.

오늘도 나는 푸시킨을 읽으며 지나가는 하루를 붙잡는다. 지금 이 순간도 사라져 버릴 것 같아 안달이 날 때가 있다. 이 조용한 평온과 행복이 너무 소중해서, 지금 옆에 있는 사람들을 간절히 지키고 싶어서.


그러나 모든 것은 지나간다. 아쉬움도, 후회도, 기쁨도.

그리고 지나가버린 것들은 결국 조용한 그리움만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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