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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탄생신화

매번 디테일은 달라지지만,

by 도토리



우리 집 아이에게는 탄생신화가 있다. 엄밀히 말하면 100% 허구로 구성된 이야기지만, 아이라는 것이, 어느 날 우리 부부에게 혜성처럼 나타난 기이한 존재이니, 마땅히 탄생신화를 만들어줄 만했다. 탄생신화라 하면 출생의 비밀, 유년기의 대범함, 신들의 전투 등이 들어가야 제맛이지만, 잠자리에서 들려주는 이야기니 축약되고, 기억력의 한계가 있으니 이야기의 디테일이 매번 바뀌기도 한다.

탄생신화를 들려줄 때는 연기력이 필수다. 각각의 인물에 맞는 목소리와 몸짓을 흉내 내줘야, 아이가 빵빵 터지기 때문이다.



"옛날 옛날, 아주 오래된 옛날. 신들이 세상을 지배했던 세상에, 인간과 신들의 세계를 하나로 이어주는 아주아주 커다란 나무가 있었어. 그 나무는 이 지구보다도 더 컸지. 뿌리는 어찌나 깊은지 저 밑의 어둠의 세계까지 닿고, 가지는 모든 생명을 품어줄 수 있을 만큼 커다랬지. 그러니까 엄청나게 큰 나무였던 거야. 그 나무 한가운데엔 아주 오래된 문이 하나 있었는데, 그 문에는 전설이 하나 있었대. 그 문이 열릴 때마다 세상에 특별한 아이가 태어난다는 이야기지.

그런데 어느 날, 눈이 포슬포슬 쌓이던 밤, 별의 문이 ‘딱’ 하고 열려버린 거야.


문이 열리자마자 신들의 세계에서는 난리가 났어. 너도나도 그 특별한 아이를 키우고 싶다고 손을 든 거야.


제일 먼저 번개 신이 뛰어와서 천둥 같은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지.

“이번 아이는 내 거다! 번개 같은 두뇌와 힘을 주겠다!”


바람신도 질세라 휘리릭 바람개비처럼 돌면서 등장했어.
“아냐, 아냐! 이 아이는 자유와 호기심이 넘치는 아이야! 내가 키워야지!”


그 말이 떨어지자 지혜의 여신이 차분히 걸어와 말했어.
“이 아이의 눈빛을 봐. 아주 날카롭고 정확해. 아마 뭐든지 완벽하게 해 내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가지고 타고난 아이일 테지. 저 아이는 내가 데려가야 해.”


그리고 마지막으로, 장난의 신이 쪼그려 앉아 작은 아기를 들여다보며 킥킥 웃었어.
“흐흐, 표정 봐라. 벌써 장난칠 준비 끝났네. 나랑 똑같아. 웃음과 장난이 필요한 법이지!”


신들은 서로 아이를 데려가겠다고 싸우고, 세상은 혼란스러워졌지.


그때였어. 별의 문에서 작은 빛이 꿈틀거리더니 아기 하나가 천천히 떠올랐지. 몸에서 별의 먼지가 후룩후룩 흩어지고, 눈은 보석처럼 예쁘게 반짝였어. 아기가 눈을 뜨자마자 바로 기지개를 쭉 켜더니 천천히 주변을 돌아봤어. 신들은 너도나도 그 아이를 가지고 싶어서 난리였지.


하지만 그 혼란을 뚫고 조용하지만 단단한 목소리가 들렸어. 인간세계의, 어느 작은 집에서 한 부부가 기도하듯 속삭였지.


“예쁜 아이를 가지고 싶어요. 소중하게 아끼며 잘 키울 테니, 아이 하나를 내려주세요."


별의 문은 그 작은 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흔들렸고, 별빛 속에서 아기는 부부의 속삭임을 느끼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어. 그리고 장난꾸러기처럼 미소 지었지.


“저기로 갈래.”


아기는 아직 말은 못 하지만, 모든 신들은 다 알아들을 수 있었대. 빛의 신이 아쉬워했고, 지혜의 여신은 고개를 끄덕였고, 장난의 신은 배를 잡고 웃었지.

“인간세상도 정말 재미있지! 가서 재밌게 잘 놀다 오너라!”

별의 문이 크게 열리고 아기는 빛의 구름 속에서 천천히, 산들바람처럼 가볍게 내려갔어.


그날 밤, 그 부부는 갑자기 집 안이 환해진 느낌을 받았대. 보이지 않는 손이 문을 열고, 눈송이들이 집 안에 들어와 춤추는 듯한 느낌. 그리고 그 빛 속에서 한 아기가 조용히 나타났지.

엄마가 아이를 품에 포근하게 안았더니, 아기는 엄마 아빠를 번갈아 보더니 작게 킥킥 웃었어. 장난꾸러기다운 첫 번째 인사였던 거야. 그 웃음이 저 멀리 하늘까지 전해졌고 신들은 모두 아이가 자신에게 맞는 집을 찾았다며 기뻐했대. 그리고 평생 저 아이를 지켜주겠닫고 다짐했대.

그러니까 너는 별의 문에서 내려온 아이고, 엄마 아빠는 너를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부부고, 너는 엄마 아빠를 선택해 준 거야."





어떠한가.

정말 유치하고 단순한 플롯의 이야기가 아닌가.


그런데 잠자리에서 아이를 꼭 껴안고 이 뻔하고 허구적인 이야기를 들려주면, 아이는 완전히 매료되어 빠져든다. 들어도 들어도 좋은 이야기인 것이다. 내 아이 맞춤용 순도 100% 뻥이기 때문에, 들려줄 때마다 디테일이 조금씩 달라지지만, 그건 전혀 중요하지 않다. 아이는 내 옆구리에 매달려 몸을 포개며 품속으로 파고든다.


."내가 엄마아빠를 선택한 거야. 엄마 아빠가 제일 좋아."


아이의 그 한마디에 나는 매번 코끝이 시큰해지고, 가슴이 일렁인다. 정말이지, 늘 이 아이는 나를 감동시킨다. 그러면 나는 의식처럼 매번 같은 말을 반복한다.


"엄마 아빠한테 와 줘서 고마워. 너는 존재만으로 존귀하고 소중해. 사랑해."


그렇게 우리 집 탄생신화의 구전 의식이 끝나고, 별의 아이는 내 품에서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스르르 잠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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