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닮은 너를, 부족한 너를
우리 집 아이는 참 묘한 존재다.
겉으로는 뭐든 완벽하게 해내고 싶어 하는 아이처럼 보인다. 웩슬러 검사에서도 ‘완벽주의’ 성향이 강하게 나왔고, 그래서인지 친구가 자신보다 피아노를, 줄넘기를, 공부를 조금만 더 잘해도 표정이 금세 굳는다.
그런데 또 마음이 급해지면 “엄마, 나 아직 2학년이라 어려. 서툴 수도 있지! 내일 챙기면 돼~ 큰일이 아닙니다요.” 같은 귀여운 변명도 잘한다. 도무지 정체를 파악할 수 없는 이 아이는 늘 극과 극을 오간다.
잘하고 싶다는 마음은 뜨겁고 큰데, 정작 그 마음을 매일 꾸준한 연습으로 이어가는 건 아직 서툴다.
마음속 이상은 저 멀리 앞서 달리는데, 발걸음은 늘 제자리 근처에서 맴도니 스스로도 그 괴리에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다.
그런 아이가 하루에도 몇 번씩 외치는 말이 있다.
아, 맞다!
초등학교에 입학해 스스로 챙겨야 할 것들이 많아지면서 그 말은 더 자주 나온다.
학교에서 단원평가지를 받아왔다고 해서 보여달라 하면 아이는 어김없이 “아, 맞다! 안 가져왔어!”라고 말한다. 학교 도서관에 반납하겠다며 챙겨간 책들은 무거운 줄도 모르고 며칠째 그대로 가방 속에 머물고, 사물함에 넣겠다던 물티슈는 며칠째 가방 모서리에 끼어 있다.
가끔은 아이 가방을 열어보기조차 두렵다. 너덜너덜해진 L자 파일,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연필들, 작고 알 수 없는 종이 조각들… 꼬맹이의 작은 세계 하나가 늘 가방 안에서 요동친다. 어지럽고 정신없는데, 또 그렇게 귀엽다.
얼마 전에는 피아노학원에서 돌아오지 않은 아이를 기다리며 ‘완벽주의 아이’를 걱정하던 내가, 오늘은 ‘매일 까먹는 아이’에게 화가 나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이 우습기도 하고, 조금 서글프기도 하다.
현실의 아이는 스스로 그리는 완벽한 이상과는 늘 거리가 있다.
하지만 어쩌면 바로 그 틈에서 아이가 가장 많이 흔들리고, 가장 크게 성장하는지도 모른다.
나는 요즘 이 질문을 붙들고 산다.
도대체 이 아이를 위해 엄마인 내가 어디까지 해야 하는 걸까.
사실 공부보다 더 어렵고 중요한 건 생활의 뼈대, 하루의 작은 습관들, 스스로 챙기는 힘이다.
열 살을 앞두고 있는데도 그런 것들이 여전히 쉽지 않은 모양이다.
혹시 나를 닮아서일까.
나도 이상은 높고, 시작은 늘 망설이고, 습관적으로 미룬다. 마음속 계획은 크고 멀고, 실제로는 우당탕탕 사는 스타일.
그래서인지 아이의 ‘아, 맞다!’가 사실은 그다지 낯설지 않다. 닮았다고 생각하면, 미워지기보단 묘하게 불안해진다. 그래서인지 아이의 "아, 맞다!"를 들을 때마다 순간적으로 화가 치솟는다.
날 닮은 너를 부족한 너를
그저 바라보기엔
후회로 물든 내 지난날이 너무 많이 다쳤어
나의 과거와 너의 지금과
너무도 같기에 두려워 겁이 나
임창정의 '날 닮은 너'의 노래가 자동으로 재생되며 골이 띵해진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이건 단순한 게으름이나 무관심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머릿속에서는 계획이 번쩍 떠오르는데, 막상 손이 가방을 찾는 순간 다른 생각이 또 밀려들고, 그 사이 어디선가 ‘아, 맞다!’가 튀어나오는 아이. 확실한 건, 이 아이는 누구보다 스스로의 이상과 현실의 간격을 크게 느끼며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틈을 메우는 게 지금 아이에게는 가장 어려운 숙제일 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화를 내지 않았다.
조용히 눈을 감고 이 꽉 깨물면서 “네 방으로 들어가서 책가방 정리하고, 내일 챙겨야 할 것들 적어보자.”이라고만 말했다.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스스로 할 수 있도록, 작은 시스템을 만들고 다듬어주는 일. 그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역할 같다.
언젠가는 이 아이의 ‘아, 맞다!’로 가득 찬 하루에도 줄과 질서가 생기고, 아이만의 리듬으로 세상을 다루는 날이 오겠지. 나는 그저 그 과정을 곁에서 묵묵히 지켜보는 사람일 뿐이다.
결국 부모라는 게 그런 존재 아닐까.
아이의 혼란과 성장 사이 어딘가에서 조용히 숨 고르며 기다려주는 사람.
그리고 뭐, 조금 우당탕탕 살면 어떠랴. 남한테 피해만 안 주면 되지.
본인 할 일만 어떻게든 해내면 되는 거지.
가까스로 감정을 추스르고 있는데, 아이가 갑자기 입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
“예전에는 똥만 싸도 박수 쳐 주더니, 이제는 혼내기만 하고.”
순간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래, 이 아이는 이렇게 허술하고, 이렇게 사랑스럽고, 이렇게 솔직하다.
이런 아이와 함께 살고 있으니, 나는 오늘도 배워가며 부모가 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