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칠하지 못한 칸들
아이가 피아노 학원을 끝내고 돌아올 시간이 한참 지나도 집 문이 열리지 않았다.
10분, 20분, 30분.
시간이 갈수록 내 마음은 초조해졌다.
혹시나 오늘도 피아노 학원에서 울고 있는 건 아닌지, 덜컥 겁이 났다.
애꿎은 무전기만 들었다 놨다 하다가 결국 외투를 챙겨 입고 집을 나섰다. 피아노 교습소 앞에서 어슬렁거리며, 투명한 문 사이로 아이를 찾았다.
원장 선생님과 눈이 마주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걸어 나왔다.
아이가 끌고 나오는 축 처진 그림자만 봐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나는 조용히 아이 손을 잡아 외투 주머니에 넣고, 아이가 마음을 열 때까지 그냥 함께 걸었다.
잠시 후, 아이가 입을 열었다.
“나… 잘하고 싶었어. 틀리는 게 너무 싫어서, 완벽하게 쳤을 때만 색칠하려고 했거든. 그래서 시간이 오래 걸렸어. 선생님은 내일 또 와서 하면 된다고 하시는데… 나는 그게 너무 싫어.”
역시나였다.
욕심 많고, 자기에게 유난히 가혹한 아이. 남들에게 지는 걸 견디지 못해, 친구가 자신보다 한 페이지라도 앞서 나갈까 봐 전전긍긍하던 아이.
나는 조심스레 말했다.
“있잖아, 엄마는 완벽하게 쳤을 때만 색칠할 수 있다는 규칙… 꼭 안 지켜도 된다고 생각해. 그 시간 동안 네가 음악에 빠져들면 그걸로 충분하거든. 엄마가 피아노 학원에 보내준 것도 네 삶에 멜로디가 있었으면 해서였지, 한 번도 안 틀리는 아이가 되라고 보낸 게 아니야. 조금 틀려도 아무 일도 안 생겨. 어깨 힘 빼고 피아노 치는 시간을 그냥 즐겨도 돼. 너무 힘들면 언제든 그만해도 되고.”
하지만 나는 안다. 이 말들이 지금의 아이에게 닿지 않을 것을.
태어날 때부터 완벽주의의 결을 가진 아이에게 “조금 틀려도 괜찮아”는 거의 의미 없는 말이라는 걸.
이 아이는 틀리는 것 자체보다 ‘틀린 내가 남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아이다.
달리기에서 1등을 못 할 것 같으면 아예 뛰지 않는 아이. 완벽하게 해내지 못할 바엔 시작조차 하지 않는 아이.
그래서 나 역시 조언을 바꾸기로 했다. 단순한 위로 대신, 아이의 세계에서 통할 만한 말을 찾기로.
“틀린 게 있어야 선생님이 너한테 딱 맞게 알려줄 수 있어. 틀림은 실패가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위한 재료야.
재료가 있어야 무엇이든 만들 수 있잖아. 그리고 있지, 스무 살의 네가 아홉 살의 너를 만났을 때 ‘왜 이렇게 못해! 더 완벽하게 해야지!’라고 말할 수 있을까? 너한테 조금 더 다정해져 보면 어떨까? 너 아직 너무 어린아이야. 조금 예쁘게 봐주라.”
완벽주의를 없애는 건 불가능하다. 그건 성격이 아니라 타고난 기질이자, 아이 고유의 무늬 같다.
하지만 그 완벽주의가 아이 스스로를 공격하지 않도록, 무엇을 잘 하든 못하든, 너는 그 자체만으로 존귀하다는 걸 알려주는 것. 그게 부모인 내가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일일지도 모른다.
아이는 완벽을 원하고, 나는 그 과정에서 피어나는 작은 빛을 본다.
겨우 아홉 살인 이 아이가 앞으로 어떤 고학년 생활을 보내고, 어떤 수험생활을 겪게 될지 아직 모른다.
다만 나는 바란다.
이 아이의 완벽을 향해 달리는 마음이 언젠가 자신을 괴롭히는 칼이 아니라 스스로를 단단하게 세우는 힘이 되기를.
엄마의 마음은 오늘도 그렇게 애가 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