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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해방군 총사령관 방귀뽕씨

정작 해방되어야 하는 건

by 도토리


어제 혼밥을 하며 유튜브를 뒤적이다가, 몇 년 전 즐겨보던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요약 편집본을 보게 되었다. 종영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3년 전 드라마라니. 세월이 빠르긴 빠르다 싶었다.

이 드라마는 법정물이긴 하지만 자극적인 살인이나 혐오 범죄를 다루지 않아, 눈살 찌푸릴 일 없이 따뜻하게 볼 수 있었다. 감동적인 요소도 있어서 나는 재방, 삼방까지 챙겨봤고, 주말 재방송이 나오면 유치원생이던 아이도 거실을 오가며 함께 보곤 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는 ‘어린이 해방군 총사령관 방구뽕’씨의 미성년자 약취유인 사건이었다. 처음엔 단순히 흥미로운 에피소드라 생각했는데, 초등학생 아이를 둔 부모의 눈으로 보니 전혀 다르게 느껴졌다.


방구뽕씨는 자신을 '어린이 해방군 총사령관'이라 소개한다. 그가 한 일은 단순하다. 하굣길에 학원 버스를 타던 아이들을 데려다가, 학원 대신 동네 뒷산에서 놀게 해 준 것이다. 술래잡기, 고무줄놀이, 말뚝박기, 군고구마 구워 먹기까지. 아이들은 오랜만에 해방감을 만끽했다.
정해진 일정을 챗바퀴처럼 소화하던 아이들이 잠시나마 진짜 웃음을 터뜨린 것이다.


하지만 그 장면이 끝나기가 무섭게, 방구뽕씨는 ‘미성년자 약취유인죄’로 기소된다. 요즘은 아이들의 책가방에 스마트태그가 달려 있어서, 교문을 통과하면 부모에게 알람이 간다. 그런데 아이가 학원 버스를 탔는데 몇 시간째 행방이 묘연하다면? 그건 상상하기조차 끔찍한 일이다.
요즘 세상에 집 앞 피아노 학원에 보내도, 십 분 안에 출결 알림이 오지 않으면 불안해진다. 하루가 멀다 하고 아동 유인 사건 뉴스가 쏟아지는 세상이니까.


그의 이상과 목적에는 공감하지만, 방법은 명백히 잘못됐다. 부모의 입장에서 보면, 극중 피해 아동들의 부모가 결국 방구뽕씨를 용서하는 장면이 쉽게 납득되지 않았다. 아이들은 피해자가 아니었다고 말하지만, ‘아이들을 해방시킨다’는 명목으로 그들을 납치한 건 변명의 여지가 없는 범죄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법정 발언은 오래 남는다.



“대한민국 어린이의 적은 학교와 학원, 그리고 부모다.
그들은 어린이를 놀지 못하게 한다.
행복한 어린이, 건강한 어린이를 두려워한다.”


“하나. 어린이는 지금 당장 놀아야 한다.
둘. 어린이는 지금 당장 건강해야 한다.
셋. 어린이는 지금 당장 행복해야 한다.”



그의 말과 요즘 아이들의 현실을 겹쳐보면, 씁쓸할 만큼 공감이 된다.



내 아이의 하루를 떠올려보면 그렇다.
학교가 끝나면 요일마다 다르긴 하지만 수학, 수영, 피아노, 미술 학원을 돈다. 집에서는 주 2회 바둑을 두고, 한글책 1시간, 영어책 1시간의 독서 시간이 정해져 있다. 월화수목금토, 거의 변함없는 일정표.
물론 시작은 “아이가 좋아해서”였다. 하지만 그 ‘좋아함’이 정말 아이의 선택이었을까?

요즘은 친구를 만나려면 놀이터가 아니라 학원으로 가야 한다. “너는 뭘 좋아해?”가 아니라 “너는 무슨 학원 다녀?”로 대화가 시작된다.


우리 집 냉장고엔 아이의 일과표가 빽빽이 붙어 있다. 나는 그것을 ‘규칙적인 하루’라 부르며 안도한다. 아이의 하루가 내 계획표처럼 돌아갈 때 묘한 만족감이 든다. 아이의 피로는 쌓이지만, 내 불안은 잠시 진정된다. 반대로 스케줄이 어긋나는 날엔 조급해진다.

아이의 하루 중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시간은 고작 한 시간 남짓일 것이다. 그런데 친구들 일정이 제각각이라, 그마저도 함께 놀 시간을 맞추기 어렵다.


“나는 다른 부모처럼 욕심내지 않아. 그냥 뒤처지지만 않으면 돼.”

내가 자주 하는 말이다.

그런데 그 문장 안에도 이미 경쟁의 언어가 숨어 있다.


어차피 내 아이가 뒤처지길 바라는 부모는 없다. 다들 ‘양껏 달리진 않더라도 멈추지는 않길’ 바란다. 결국 ‘자신의 속도로 걷게 하자’는 말은 구호에 그칠 때가 많다. 멈추면 불안하니까.

아이를 위한다고 말하지만, 어쩌면 두려운 건 나 자신이다. 아이의 성적표는 곧 부모의 성적표니까.


내가 사는 신도시는 학군지가 아니지만, 그래도 부모들은 아이를 놀게 하지 않는다. 하굣길 학교 앞에는 학원 버스가 줄지어 서 있고, 영어·수학은 기본에 독서토론, 논술, 악기, 운동까지 채워 넣는다.


엄마들 대화는 늘 비슷하다.
아이들이 다니는 학원, 선행, 예체능, 경시대회 등등.


그런 대화를 듣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흔들린다.


나 역시 경쟁에서 밀릴까 봐 불안해지는 평범한 엄마다. 아이의 속도를 존중하고 싶지만, 내 불안이 그보다 먼저 달린다.


방구뽕씨는 분명 범죄자였다. 하지만 그가 외친 말은 어른들의 마음을 찔렀다. 어쩌면 해방이 필요한 건 아이들이 아니라, 우리 어른들 인지도 모른다. 타인의 시선에서, 불안에서, ‘뒤처질까 봐’의 공포에서.


나는 오늘도 아이의 학원 가방을 챙기며 생각한다.
아이를 지킨다는 건 뭘까.
내 불안을 달래는 일일까, 아니면 아이가 웃을 시간을 남겨주는 일일까.


언젠가 아이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엄마, 나 오늘은 학원 안 가고 놀고 싶어.”

그때 나는 웃으며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 그럼 오늘은 우리 실컷 놀자.”

그 단순한 대답을 하기까지, 아마 나는 먼저 나 자신을 해방시켜야 할 것이다.


방구뽕의 세상은 허구지만, 그가 외치던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나는 아직 아이를 해방시킬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적어도, 내 어깨의 힘을 조금은 빼보려 한다.

내 불안이 아이의 하루를 지배하지 않도록. 아이가 잠시 멈춰 설 수 있는 틈 하나쯤은, 내가 만들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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