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다른 심장, 같은 순간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내 안에서 가득 차올라, 이대로 가면 다 쏟아져 버릴 것 같을 때가 있다.
그럴 땐 온 힘을 다해, 부서질 듯 아이를 안는다. 이 아이를 내 몸으로, 내 마음으로 다 품고 싶은 마음으로.
무릎을 꿇어 키를 맞추고 아이를 끌어안으면, 작은 새순 같은 심장이 달음박질치듯 뛰는 게 느껴진다.
내 심장은 그 옆에서 느릿하게 움직인다.
호기심으로 가득한 아이는 집에 머물 때조차 세상을 향해 달려간다.
그런데 내 워치는 하루 종일 ‘편안함’이라는 상태를 벗어나지 않는다. 운동량을 기록하려 산 시계는, 이제 내가 얼마나 ‘조용히 기능하며 사는가’를 증명하는 물건이 되었다.
그런데 문득 궁금해진다.
왜 심장은 ‘뛴다’고 표현할까.
어제 우연히 본 <싱어게인4>에서 백지영 가수가 말했다.
“노래는 말하듯 상대의 마음에 닿아, 그 사람의 어떤 것을 부르기 때문에 ‘노래를 부른다’고 하는 거야.”
참 좋은 말이었다.
그럼 심장은 왜 ‘뛴다’고 할까.
‘심장이 뛴다’는 건 단순한 생리 현상을 넘어선다.
그건 ‘살아 있음’ 혹은 ‘감정이 동요하는 순간’을 뜻한다.
스스로 제어할 수 없을 만큼 안에서 터져 나오는 생의 힘, 그게 뛰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심장을 뛴다’고 하지 않는다. 그건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는, 통제 불가능한 살아 있음의 반응이기 때문이다.
아이는 세상을 향해 뛴다.
모든 자극이 새롭고, 모든 경험이 생의 증거이니까.
나는 그 옆에서 기능한다. 익숙함과 계산이 내 감정을 눌러 앉히기 때문이다.
결국 ‘심장이 뛴다’는 건, 감정이 살아 있는 상태를 비유하는 말이다.
‘살기 위해 뛰는’ 엄마와 ‘느끼기 때문에 뛰는’ 아이의 심장은 서로 다른 리듬으로 산다.
그래서 아이는 자주 으르렁대고, 나는 늘상 심드렁하다.
서로의 주파수는 좀처럼 맞지 않는다.
그럼에도, 아이를 꼭 안는 그 순간만은 내 심장도 아이의 리듬을 따라 뛴다.
온전히 함께 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