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학 간 친구의 집에 초대받은 날
저번 달, 같은 아파트에 살던 아이 친구가 전학을 갔다.
입학하고 아이에게 처음 “우리, 친하게 지내자”라는 편지를 건네준 아이. 수줍음 많고 조용해 보이지만, 자신의 할 일은 묵묵히 해내는 외유내강의 단단한 아이였다. 아이는 자신과 정반대 성향의 그 친구를 참 좋아했다.
가만가만히 말하는 모습이, 수줍은 듯 작게 내는 목소리가, 일렁이는 눈짓이 귀엽다고 했다.
초등학교 1학년, 여덟 살이라면 모두가 다 귀여운 나이인데, 누가 누구를 귀여워한다는 말에 나는 괜히 웃음이 났다.
하지만 친구가 이사를 가게 됐다. 아이는 슬퍼했고, 사총사 중 한 명의 빈자리가 뻥 뚫린 듯 허전하다고 했다.
매일 같은 시간, 여덟 시 십오 분이면 만나서 조잘거리며 함께 학교에 가던 아이들은 전학 간 친구의 빈자리를 아프도록 실감했다. 채 완성되지 못한 그림처럼, 아파트 앞 신호등에서 괜히 몇 박자씩 더 머물렀다.
그러다 한 달 뒤.
전학 간 친구의 집에 초대를 받자 아이는 거의 날아다닐 기세였다. 매일같이 "엄마, 이번 주 맞지?" "엄마 오늘이지?"라며 확인했다. 사총사가 모두 모이지는 못했지만, 그것쯤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네 시간 동안 아이들은 쉴 새 없이 웃었고, 행복해했다. 어쩜 한 번을 다투지 않고 저리 편안하게 놀 수 있는지, 지켜보는 것만으로 흐뭇했다.
아이들은 슬라임을 주물럭거리다가, 보드게임에 몰두하다가, 역할극을 하다가— 마지막에는 자기들끼리 급조한 연극을 만들어 엄마들 앞에서 발표까지 했다.
작은 몸들이 서로의 손을 잡고 만들어낸 그 어설픈 연극이 어쩐지 귀엽고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그 집 아이가 엄마에게 물었다고 한다.
“엄마, 왜 나는 전학을 갔어야 했어?”
엄마는 마음이 아팠지만, 필요한 선택이었다고 말했다 한다.
보양재가 덮여 있는 엘리베이터, 새로 지은 아파트, 리조트 같은 풍경, 반짝이는 공간들. 나는 마냥 부러워했다.
어른이라면 자연스레 시선이 가는 것들이다.
어른들은 공간을 본다.
입지, 대출, 부동산, 가치, 커뮤니티, 학군 이야기로 대화를 채운다.
나 역시 그랬다. 그리고 그 순간 살짝 부끄러워졌다.
아이들은 사람 그 자체를 보고 웃는데, 나는 숫자와 조건을 먼저 계산하고 있었구나 싶어서.
그런데 아이들은 달랐다.
오늘 만난 사람처럼, 어제의 헤어짐 따위는 없었던 것처럼,
어쩌면 ‘왜 헤어져야 했는지’보다 ‘다시 만나서 너무 좋다’는 감정이 더 큰 듯했다.
그 시간들을 통째로 즐기고, 온몸으로 행복해했다.
그 아이들의 웃음을 보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너무 어른처럼만 살아왔구나, 우리가 잃어버린 걸, 아이들은 아직도 단단히 붙잡고 있구나.
어른들은 집값과 입지로 세상을 계산하지만, 아이들은 사람 하나로 하루를 환하게 밝힌다.
그래서 아이들의 세계가 더 넓고, 더 따뜻하고, 어쩌면 더 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