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가면 라면, 겨울 하면 라면

파란 렌즈 그녀

by 민시

가을이 있었을까? 이번 여름은 유독 길게 느껴졌다. 그러나 이제 좀 살 것 같으니 그새 또 추워졌다. 나쁘지 않았다. 열심히 살았다는 증거였다. 추워지면 사람들은 나오지 않았다. 나오면, 머물고 가기를 바라는 마음은 바라기만 하면 안 됐다. 움직여야 했다. 겨울만큼은 분식집이 되어도 좋으니 사람을 모아야만 했다.


맘 카페에 손님을 가장한 글을 올렸다. 작년 겨울에 먹었던 라면이 맛있었다며. 가을이 가면 라면의 계절, 겨울 하면 라면의 계절. 물론 라면은 사계절 내내 맛있지만. 작년 겨울과는 달리 손님은 어른에서 어린이로 넘어왔다. 수시로 전화하는 어머니들의 예약에 편하기도 했다.

“사장님~ 라면 하나요~ 꼭 거기서 먹겠대요~ 애 내려보낼게요~!”

역시, 삶의 지혜라는 건 곳곳에 드러난다. 배울 수 있는 게 넘치고 넘쳤다. 어차피 어른 지갑이 열리는 건데, 어른을 타깃으로만 잡을 게 아니었다. 아이들에게 잘해주고 또 잘해줬다. 사장님이 아닌 이모가 되어 품었다. 희망이었던 터를 원망했던 내가, 다시 희망을 얻은 것 같았다.


눈이 오면 오는 대로 카페 앞은 안전했다. 열 많고 호기심 많은 아이, 뛰어놀아야 하는 아이들에겐 우리 카페는 키즈카페나 다름없었다. 엄마들에겐 설득하듯이 공지했다. 라면과 커피, 라면과 아이스티를 세트로 저렴하게 팔기로. 단, 원활한 회전율을 위해 음료는 테이크아웃만 가능하다고. 엄마들은 아이 이름과 연락처를 남기고 커피를 받아서 집으로 향했다. 아이들은 음료에 이름을 써서 보관 테이블에 나란히 올렸다. 다 먹은 아이들부터 차례로 나갔다. 아이들은 창문 밖으로 엄마들의 CCTV가 있는 안전한 밖에서 뛰어놀고, 엄마들은 아이들의 끼니 걱정도 없고, 나는 돈 벌고. 서로에게 윈윈인 샘이었다.

“얘들아~ 너무 놀았어~ 들어와서 몸 녹여~!”

들어와서 목 축이고 몸 녹이고. 두 시간이 넘게 뛰어논 아이들은 설득해서 집으로 돌려보냈다.


잠시 외출한다고 붙여놓고 마트로 향했다. 간식거리도 애매하고, 나도 산책 겸 운동 좀 하려고. 필요한 것만 사 들고 계산대를 거쳐 나왔다. 누군가 바람을 일으키며 내 앞으로 뛰어갔다. 단백질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긴 머리카락, 고개를 돌리게 만드는 꼬릿한 향내를 풍겼다. 입술을 오므리며 콧구멍을 가렸다. 에스컬레이터에 먼저 올라탄 그녀는 어딘가 이상해 보였다. 잠시 돌아보는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파란 렌즈 그녀였다. 그녀는 당황한 듯 눈을 끔벅거렸다. 잠시 어긋난 파란 렌즈 사이로 초점이 이상했다. 더 바라보게 됐다. 당황한 듯 돌아선 그녀와 인사는 하지 않았다. 그제야 그녀의 발이 보였다. 어그 슬리퍼 한 짝은 어디 두고. 여러모로 모양 빠진 그녀의 모습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아무 일 없다는 듯 걸어갔다. 카트를 두고 돌아서는 찰나, 그녀는 다시 내 앞을 지나갔다. 어그 슬리퍼는 양쪽 다 신고 있었다.

‘내가 잘 못 봤나?!’


며칠 후, 한가한 시간대에 전화를 받았다. 여덟 살, 여섯 살 아이 둘만 심부름을 보낸다고 했다. 라면 먹고 오기로. 대충 걸치고 귀여운 아이들을 마중 나가듯 나갔다. 2차선 맞은편, 파란 렌즈 그녀와 마주쳤다. 그녀는 엄마들과 편의점 앞에서 컵라면과 함께 맥주를 들이켜고 있었다. 이미 소식을 들었을 테니 우리 카페에도 겨울이면 라면이 있다는 것쯤은 알 텐데. 이 추위에 밖에서 먹는 맥주와 컵라면은 감성인가? 나는 그녀들의 자존심을 지켜주기로 했다. 맞은편에 서서 건너가지 않았다. 그녀들의 눈앞에서 서성거렸다. 쳐다보든 말든. 마침 아이들이 신나게 뛰어왔다. 아이들을 챙겨 카페로 향했다. 그날은 따듯한 카페에서 아이들과 라면도 함께했다.


이미 놀고 있는 아이들을 위해 고구마를 오븐에 넣었다. 넓게 퍼지는 군고구마 냄새는 추위로 내뱉는 입김에서, 곧장 따듯한 입김이 되어 뿜어졌다. 카페 사장으로서, 동네 이웃으로서 나름의 서비스이자 인심이었다. 모두가 뿜어낸 따듯한 입김, 인심은 인심으로 돌아왔다. 몇몇 엄마들은 시골에서 보내주신 구황작물을 우리 카페로 가져다준 덕분에 카페는 겨울 내내 춥지 않았다. 따듯하고 달콤하고, 너도나도 즐기는 라면 냄새까지. 누군가에겐 추억이고 감성인 기억을 따듯하게 입은 곳간이 되었다.


시간이 머물고 사람이 머물며, 마음이 머문다. 현실이 각박하여 숨통을 조였던 우여곡절의 시간, 나라는 사람을 더욱 단단하게 만든 시간이 되었다.

“투둑, 투둑, 지이이잉”

‘아.. 돌고 도는 쳇바퀴여..’

시간에 데이고 사람에게 데이며, 마음 깊숙이까지 데이면 그만큼 곤란한 게 또 있을까? 아니, 반복되는 게 당연한 순리일까?

“어머어머~!! 사장님 오랜만이야~~! 라면 끓여준댔는데~ 군고구마도 팔아요~? 냄새 좋네~!”

“안녕하세요~! 고구마 드릴까요? 식이섬유니까 유산균이 필요 없네요~!” 볼륨을 올린 듯 자동으로 목소리가 한 톤 올라갔다. 내가 왜 이럴까. 피해의식일까, 방어기제일까? 똑같은 콧소리를 내며 능청스럽게 주문을 받았다. 요구르트 아주머니께 따듯하고 굵직한 군고구마 하나 건넸다. 돈은 받지 않았다. 아주머니는 그날 내게 영업을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권하지 않았다.

‘그래, 앞일 걱정은 하지도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