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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와 지하에서 온 투명인간

그녀를 바라보며 산 투명인간의 이야기

by 구시안



1. 르네와 그의 만남






간과하기 쉬운 사실입니다. 당신은 죽어가고 있다는 겁니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봐야 누구도 영원히 살 수 없습니다. 당신은 우연이든 필연이든 살아가며 나를 자주 만나게 될 겁니다. 물론 당신이 살아 있는 동안 말이죠. 나는 산사람에겐 접근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웠었죠. 이젠 상관없는 일입니다만, 돌이켜 보니, 간혹 예외도 있었습니다. 그중 한 존재가 기억나는군요. 르네라는 소녀였지요. 저는 그녀에게 관심이 없었지만, 그녀가 제 이목을 끌었답니다. 그녀에게 나는 보이지 않는 존재 투명인간이었습니다.



파리의 어느 추운 날. 살을 에는 바람과 눈 속을 뚫고, 그녀가 어린 남동생의 손을 잡고 파리의 외곽을 돌며 구걸하는 것을 보았지요. 거리에는 전쟁의 폐허 속에 널브러진 시체들이 썩어가고 있었지요. 그 시체들 사이에서 아무렇지 않게 장사를 하고 있던 상인들이며, 지나가는 사람들조차 그 불쌍한 남매에게 도움을 주기는커녕, 더러운 벌레처럼 바라보며 침을 뱉고 가는 사람들도 있었지요. 역시나 누구도 그 남매를 도와주려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있었습니다.



흥미로운 건, 그녀의 남동생이었죠. 이상하게도 검게 그을린 그 작은 소년의 보잘것없는 몸에는 달콤한 복숭아처럼 느껴지는 향기를 갖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 아이의 맛을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저는 너무 굶주려 있던 나머지, 그녀의 남동생을 데려가기로 마음먹었죠. 해가지고 거친 눈발의 휘날림이 잠잠해질 때쯤, 그녀가 생선장수들로 가득한 골목을 벗어나 냄새가 지독하게 풍기는 작은 골목길을 지나, 마치 누군가의 피로 물들어 버린 붉은색으로 물든 나무 문 아래 자리를 잡고 앉은 그때였습니다. 허기로 지쳐버린 동생을 눕히고 허름한 망토를 이불 삼아 덮고는 곤한 잠에 빠져 있을 때, 저는 그녀의 곁에서 남동생을 데려갔습니다. 그리고 떠오르는 새벽에 얼어붙은 망토 아래 싸늘하게 식어버린 동생의 모습을 지켜보는 그녀를 보았지요.



근데 신기하죠? 그녀는 울지 않았습니다. 슬퍼하는 표정도 보이지 않았지요. 마치 창백하게 윤이 나는 아무 표정 없는 도자기 인형처럼 느껴졌습니다. 평소와 다른 점을 느끼고 저는 의심을 품었죠. 그녀는 사람이 아닐까. 그녀는 분명 어린 소녀. 사람이었는데 말이죠. 사람이라면 어김없이 목놓아 울어야 마땅했지만 그녀는 아니었죠.



그녀는 자신이 동생과 함께 작은 몸을 감싸던 낡은 망토를 동생의 육체 위에 덮어 주었지요. 그리고 그녀는 어디론가 말없이 힘없는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녀가 저의 이목을 끈 것이었죠. 저는 궁금했습니다. 저 어린 소녀의 머리에는 무엇이 들어 있는지를. 저는 원칙을 어기고 그녀의 삶을 따라다니기로 했지요. 재밌을 거 같았거든요. 그녀가 앞으로 무엇을 할지, 어디서 잘지, 무엇을 먹을지, 어떻게 커가고, 어떻게 혼자 살아가게 될지가 궁금해졌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르네였습니다. 불쌍한 소녀였죠. 전쟁이 남긴 쓰라린 상처를 고스란히 지닌 고아 소녀. 저는 이상하게 자꾸만 르네에게 마음이 갔습니다. 르네의 머릿속을 들여다보았지요. 역시나 거리에 굴러다니는 다른 아이들과 다를 건 없었습니다. 전쟁통에 잡혀간 어느 유대인의 딸이었지요.



그녀의 부모는 가난했고, 글을 쓰는 작가인 아버지와 간호사로 일하는 어머니였습니다. 푸르른 들판이 자리한 어느 호숫가에 그녀의 아버지와 배부른 어머니가 한가로이 피크닉을 즐기며 행복해하고 있었지요. 곧 태어날 아이의 이름을 짓고 있었습니다. 함께 있던 그녀의 할아버지는 프랑스인이었습니다. 그녀의 할아버지는 아름다운 유대인이었던 여인을 만나 사랑을 나눴지요. 들여다보니 동화처럼 아름다운 이야기더군요. 시간이 지나 할아버지가 그녀를 안아 들어 올렸을 때 지어준 이름은 르네였습니다. 아름다운 이름이었죠. 하지만 그 행복은 오래갈 수 없는 것이었지요. 사람은 전쟁을 좋아했고, 전쟁 속에 저는 희열을 느끼며 바쁜 나날을 보냈던 기억이 나는군요. 르네의 동생이 태어나고 몇 해가 지난 후였습니다. 학문과 지위를 막론하고 잡아드리는 나치들에게서 그들 역시 벗어나기 힘든 존재였지요. 다행히도 나치들이 집으로 들이닥쳤을 때 마룻바닥에 숨어 동생의 입을 틀어막고 있던 르네의 모습은 누구보다 침착해 보였습니다.



그녀 덕에 아우슈비츠로 향하는 열차에 남동생은 부모의 손을 잡고 타지 않아도 됐으니까요. 물론 어이없게도 굶주려 있던 저에게 희생되는 운명이긴 했지만. 그건 어쩔 수 없던 일입니다. 저도 제 할 일을 했던 것뿐이니까요. 르네는 작은 몸으로 동생을 데리고 도시를 빠져나왔습니다. 허기진 몸을 이끌며 걷고, 또 걸어서 온 곳이 파리였던 것이었죠. 그리고 저를 만나게 된 겁니다. 그 일대를 돌며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었던 저를 하필이면 그때. 만나게 된 것이었죠. 그렇게 저는 르네를 오랜 시간 따라다녔습니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 르네가 정착하게 된 곳은 푸르른 들판이 펼쳐진 남부 외곽의 농장 마을이었습니다. 길가에 쓰러져 있던 그녀를 가엽게 여긴 어느 부부였죠. 그 부부에겐 아이가 생기지 않았죠. 그 마을에서 묵묵히 농사를 짓는 부부의 품에 그녀는 원하지 않았지만 흘러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양부모는 착하고 좋은 사람들이라 싫었습니다.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아름다운 천사들 같았죠. 르네는 흐르는 시간 속에 양부모에게 단단히 잠겨 있던 마음을 서서히 열어갔지요. 시간 속에 르네는 가슴속까지 느껴지는 양부모의 진심 어리고 따뜻한 사랑에 행복해했습니다. 저는 그것이 싫었습니다. 그녀가 다시 예전처럼 나를 사로잡았던 그 무표정한 르네로 돌아오길 바랐으니까요.



끝난 줄 알았던 전쟁은 계속되어 갔지요. 독일군들이 파리에 입성하면서 이야기는 달라졌습니다. 저에게는 르네를 되찾을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였죠. 유대인 집안이었던 양부모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다시 르네를 홀로 남겨 관찰할 수 있게 됐을 때의 희열을 아직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녀는 어릴 적과 반복되는, 자신의 곁에서 사라지는 부모라는 존재에 대해 생각했죠. 모든 게 부서져 있는 어두운 집안에 홀로 남겨진 그녀는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보고 싶던 르네 다운 표정이었죠.




독일군들이 다녀가고 폐허가 되어버린 집안에는 고요함만이, 그리고 르네 옆엔 제가 자리하고 있었지요. 그녀는 힘없는 몸을 떨어뜨리고 탁자 밑으로 들어가 작은 몸을 웅크렸습니다. 탁자를 덮고 있던 나치들의 군홧발로 일그러진 레이스가 달린 작은 하얀 천을 덮고, 그녀는 깊은 잠에 들었지요. 저는 그런 르네의 모습이 숨 막히게 아름답다고 느꼈습니다. 저도 조용히 르네의 곁에서 밤을 노래했지요. 그녀에게는 들리지 않는 자장가를 선물하고 있었습니다.




열한 살이 된 르네의 얼굴은 아름다웠습니다. 도시와 너무나 멀리 떨어진 외곽인 이곳에서 르네는 살아남으려 애쓰고 있었습니다. 먹을 것들을 구하고, 집안의 망가진 것들을 고치려 양아버지가 쓰던 마구간의 장비들을 작고 앙증맞은 손으로 만져보며, 자신만의 작은 보금자리를 만들어가려 했습니다. 그런 그녀를 방해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저에게는 르네의 모든 것이 재밌는 이야기였으니까요.



르네가 양어머니의 작은 서재에 눈을 돌리고 있었습니다. 빛바랜 나무 책상 위에는 양 어머니의 일기장과 종이 끈으로 묶여 쌓여있는 이름 모를 편지들이 있었고, 어두운 작은 방안에는 수많은 책들이 사각형의 방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지요. 르네는 궁금했습니다. 엄마가 무엇을 썼을지. 저 책들에는 어떤 이야기가 있는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르네는 글을 읽지 못했습니다. 글을 배운 적이 없었지요.



저는 그런 그녀가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녀의 꿈에 들어가기로 했지요. 저는 밤마다 그녀의 꿈에 나타나 글을 가르쳐 주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매일 깊은 밤, 해가 뜨기 전까지 르네의 꿈속에서 글을 가르쳤습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고, 피로 물든 파리도 어느덧 전쟁의 열기를 식히며 도시 곳곳마다 하얀 안개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르네는 드디어 책이라는 것에 손을 대기 시작했지요. 모두 저의 노력의 결과물이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어떻게 글을 읽게 됐는지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 꿈속에 남자는 생생했고, 현실적이며, 자상한 남자였으니까요. 저는 모든 꿈을 그렇게 설계했습니다. 르네에게 사람이라는 존재를 상대로 처음으로 느껴보는 미안한 감정이라는 것도 있었기 때문이었죠. 하지만 변함은 없습니다. 언제나 그랬듯 내가 사람들에게 바라는 건 행복했다가 다시 불행하길 바라는 존재였으니까요.



르네는 말이 없었습니다. 매일 허기진 배를 채우고 나면, 작은 불을 벽난로에 집히고 앉아 책을 읽었습니다. 그녀의 꿈속에 들어갈 틈도 주지 않을 만큼 그녀는 수많은 책을 읽어갔습니다. 그녀를 지켜보며 저 역시 수많은 책들을 함께 읽게 됐지요. 그것은 오랜만에 느껴보는 편안함이었습니다. 많은 사람의 눈들이 제가 지나온 거리를 알지 못할 겁니다. 저는 그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니까요. 책 속에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숨 쉬고 있었습니다. 르네와 함께 읽는 책은 어느새 편안함에 물들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문득, 르네에게 보이지 않던 제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녀가 열다섯이 되던 날. 저는 그녀의 곁에 나타나기로 했습니다. 어쩌면 르네가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내가 지은 죄를 지적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떨리기도 했습니다. 르네는 제가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 중에 신비로운 눈을 갖고 있었으니까요. 그녀의 눈은 진실한 모든 것이 들어있는 듯했습니다. 마치 어릴 적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그 깊은 눈은 하얀 빙하가 녹아 스며있는 듯한 것이었습니다. 르네의 눈동자와 색깔은 언젠가 프랑스의 도시를 가로질러 건너며 보았던 깊고 푸르른 안시 호수와 닮아있었습니다.



르네가 쓸쓸한 탁자 위에서 홀로 밥을 먹고 있을 때, 뒤편의 창문으로 그녀에 곁에 나타났습니다. 처음에는 그녀가 금세 알아챌까 봐 검은 그림자로 나무처럼 서 있었습니다. 그녀의 뒷모습은 아름다웠습니다. 바람에 조금씩 휘날리는 금발의 르네의 머릿결에서 향기로운 냄새가 흘러나왔습니다. 르네가 뒤를 돌아보았을 때 나는 어둡고 두꺼운 커튼 뒤에 숨었습니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후회가 들었습니다.



르네가 설거지를 하는 모습을 보며 망설였습니다. 형체를 갖추기 위해 소비한 에너지가 많았던 상태였습니다. 나는 그녀에게 내가 누구인지를 설명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가슴 쪽의 두근거림이 느껴졌습니다. 나에게는 심장이 없는데도 말입니다. 그녀가 다시 서재로 들어가는 뒤를 따라 그녀가 문을 닫기 전 소리 없이 그녀를 따라갔습니다. 그녀가 벽난로에 불을 집히고 나서 뒤돌아섰을 때, 르네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르네는 어릴 적 표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놀라지도 겁내하지도 않는 표정이었습니다. 더 놀란 것은 서서히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의 모습 때문이었습니다. 조금씩 저의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르네도 한 걸음씩 저에게 다가왔습니다.



" 왜 이제 나타난 거죠? "

" 그게.... "

" 저는 꿈이 현실이 되리라 믿고 있었어요. 꼭 나를 찾아와 줄 거라 생각했어요."

" 아니...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 저는 당신을 매일 꿈속에서 만났어요. 분명 이건 꿈이 아니겠죠? 그렇죠? "



그러고 보니, 그녀의 옆에 있었으면서도 르네의 목소리를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마치 가늘고 긴 첼로 현처럼 흐르는 그녀의 목소리는 감미로운 것이었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어떠한 주문도 이루어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알 수 없는 떨림이 나를 사로잡아 삼켜버릴 것만 같았습니다. 잠시 그녀의 어깨에 두 손을 올려 그녀를 살며시 밀어냈습니다. 그녀의 눈에는 처음 보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기쁨의 눈물인지 슬픔의 눈물인지 가늠할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그저 그녀에게 나를 보여주고 싶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녀가 이렇게까지 나를 그리워하고 있었다는 것이 놀라웠습니다. 그럴수록 나는 점점 그녀를 멀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 이상 다가가면 안 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제가 보고 싶지 않았나요? 매일 밤 제 꿈에 나타나, 나를 살게 해 준 사람이 당신이 맞나요? "

" 맞단다. 하지만 나는 너를 살게 하려 나타났던 건 아니야. 내가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해버린 거 같구나. 다시 사라져 주는 것이 날 거 같아. "

" 가지 마요! 더 이상 내 곁을 떠나지 마요. 제발."

" 아니. 넌 나의 존재를 알게 되면 죽게 돼. 나는 그런 존재고, 너는 사람이니까."

" 당신이 어떤 존재이든 상관없어요. 제발. 떠나가지 말아 주세요. 제 곁에 있어주세요. 부탁이에요."

" 그럼 조건이 있어. 내가 말해준 모든 것들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비밀로 지켜준다면, 네가 원하는 대로 네 옆에 있어줄게."

" 좋아요. 뭐든 하겠어요. 그러니 제발 옆에 있어줘요."



저는 본분을 잊지 않고 그녀에게 또 주문을 걸고 말았지요. 수없이 앗아간 목숨이, 제가 지하의 어두운 불속으로 처넣은 사람들이, 이제는 샐 수도 없었는데 말이죠.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숙명 같은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런 일을 하는 존재니까요. 사람들은 늘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지려 하고, 어떤 일이 닥칠지도 모르면서, 늘 지키지도 못할 비밀을 폭로하면서도,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제가 건네는 계약서에 쉽게 사인을 해버린 다는 것이었지요. 그건 내가 사랑하게 된 르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돌이켜 보면 그녀의 외로움 때문만은 아니었으니까요. 사람에게는 많은 감정이 있다는 것을 르네를 통해 배우게 됐으니까요.



벽난로의 불이 무르익어갈 즘 우린 작은 탁자에 앉아, 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그녀에게 감출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처음 그녀의 동생을 앗아간 순간부터 그녀가 여기 오기까지 늘 곁에서 바라보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시작해 주었지요. 이야기는 피아노의 선율처럼 자연스럽게 흘러갔습니다. 이야기를 듣는 그녀의 눈은 한 번도 저에게서 벗어난 적이 없었지요. 푸르른 달이 물들고 깊은 새벽의 기운이 감돌아 벽난로가 꺼지고, 그녀가 든 침실 맡에 작은 촛불이 켜지고 타들어갈 때까지, 그동안의 이야기들을 들으며 그녀는 잠들어 갔습니다.



낮과 밤이 바뀐 르네는 적응해 갔지요. 끝없이 그녀를 바라보며 살았던 시간 속에 이야기들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리고 붉게 타오르는 태양이 뜨기 전, 그녀의 잠든 모습을 바라보다가 저는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지요. 그녀의 꿈속에 들어가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녀에게 시간을 주고 싶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제가 르네를 떠나는 것이 옳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것이 정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매일 밤 이야기를 전해주면서도, 그녀의 은은하게 미소 지은 입가에 입을 맞춰주고 싶다는 생각이 물들어 버릴 때까진 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저의 이야기를 소리 없이 흔들리는 촛불아래서 들어주었습니다.



오랜 시간, 모든 이야기를 들은 르네는 마치 지난 일들을 회상하듯 푸르른 달빛이 켜진 창가로 다가가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카락을 쓸어내리고 있었습니다. 마치 제가 저지른 죄와 수많은 영혼들의 노래를 이해라도 하듯 뒤돌아서서 나를 보고 웃는 르네를 멀리하기란 힘들었지요. 이미 계약은 되었고, 그 계약은 진행 중이었으니까요. 인간이라면 어느 누구도 파기할 수 없는 계약조건이 제가 가진 전부일 수도 있었습니다.



모든 있었던 일들을 한올도 빠지지 않고, 시간의 실타래 엮인 르네를 바라보는 제 이야기는 끝을 맺게 되었지요. 르네에게 모든 것을 건넨 상태에서 이제는 그녀가 이 계약을 어디까지 끌고 가게 될지가 궁금했습니다. 과연 그녀는 저의 비밀을 지킬 수 있을까요? 그리고 저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요? 그녀가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이유를, 제가 그녀를 데려가지 않은 이유를 그녀는 아직도 모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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