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유효기간을 인정하는 일
나에게 사람을 만나는 일은 시간이 흐를수록 생각보다 조심스러운 사건이 되어 갔다.
연말이 되면 자연스럽게 스쳐갔던 이야기를 남긴 모든 것을 생각해 보게 된다. 그 중 아마도 사람들이 가장 많이 떠올리게 되는 것은 맺어졌다가 풀려버린 사람에 대해서 일 것이다. 그 잔향은 늘 연말이 되면 받게 되는 원하지 않는 선물처럼 찾아오는 것이니 말이다.
우리는 흔히 만남을 가볍게 말한다.
인연이라 부르고, 우연이라 부르고, 때로는 필연이라 부른다. 그러나 한 사람의 삶 속으로 들어가는 일은 결코 가벼울 수 없다. 그 안에는 이미 쌓여온 기억과 상처, 기대와 두려움이 함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단순히 시간을 공유하는 일이 아니라, 서로의 세계에 잠시 발을 들이는 일이다.
그래서 만남에는 언제나 책임이 따른다.
우리는 상대를 이해하기도 전에 기대하고, 알기도 전에 의미를 부여한다. 심리적으로 인간은 관계 속에서 자신을 확인하고 싶어 한다.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인지, 받아들여질 수 있는 사람인지. 그래서 만남은 설렘과 동시에 불안이다. 우리는 타인을 통해 자신을 증명받고 싶어 하면서도, 거절당할 가능성 앞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조정한다.
나이가 들어가며 느끼게 되는 만남은 항상 불완전한 인식 위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상대의 일부만 보고 전체를 안다고 착각한다. 말투, 태도, 몇 번의 대화가 한 사람을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인간은 언제나 말해지지 않은 부분을 더 많이 가지고 있다. 그래서 좋은 만남이란, 상대를 빨리 규정하지 않는 태도에서 시작된다. 이해하려 들기보다, 남겨두는 여유를 갖는 일이다.
사람을 만나는 일은 한 권의 책을 읽기 시작하는 것과 닮아 있다.
첫 문장만으로 결말을 예측할 수 없고, 중간에 마음이 멀어질 수도 있으며, 끝까지 읽고 나서야 비로소 의미가 생기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읽는 태도다. 급하게 넘기지 않고, 마음에 닿는 문장에서 잠시 멈출 수 있는가.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모든 만남이 계속될 수는 없다.
오히려 대부분의 관계는 언젠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그때 필요한 것이 놓아주는 방법이다. 사람을 놓아준다는 말은 흔히 차갑게 들리지만, 사실은 아주 섬세한 기술에 가깝다. 심리적으로 우리는 관계의 끝을 실패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버림받았다고 느끼거나, 내가 부족했다고 해석한다. 그래서 끝을 인정하지 못하고 관계를 붙잡는다.
하지만 모든 관계에는 유효기간이 있다.
그것은 사랑의 크기나 진심의 정도와는 별개의 문제다. 어떤 관계는 특정한 시기의 나에게 필요했고, 그 역할을 다한 뒤 자연스럽게 물러난다. 철학적으로 보면, 놓아줌은 부정이 아니라 완성의 다른 형태다. 끝났다는 사실이 그 관계의 의미를 지우지는 않는다.
사람을 잘 놓아주는 데에는 몇 가지 태도가 필요하다.
첫째, 상대를 악역으로 만들지 않는 일이다. 관계가 끝났을 때 우리는 종종 서사를 다시 쓴다. 상대의 단점만을 부각시키고, 나의 상처만을 강조한다. 이는 자기 보호를 위한 심리적 방어이지만, 동시에 관계 전체를 왜곡한다. 좋은 이별은 상대를 깎아내리지 않아도 가능하다.
둘째, 설명되지 않는 감정을 허용하는 일이다.
어떤 관계는 명확한 이유 없이 멀어진다. 그때 우리는 이유를 만들어내려 애쓴다. 그러나 모든 감정이 논리로 설명될 필요는 없다.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이별은 덜 잔인해진다.
셋째, 미련을 부정하지 않는 일이다.
놓아준다는 것은 아무렇지 않다는 뜻이 아니다. 그리움이 남아도 괜찮고, 가끔 떠올라도 괜찮다. 중요한 것은 그 감정이 다시 관계를 강제로 이어 붙이게 만들지 않도록, 자기 삶의 중심을 지키는 것이다.
문학속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관계는 대개 완벽하게 이어지지 않는다.
대신 서로에게 흔적을 남긴 채 각자의 길로 흩어진다. 그것은 실패가 아니라, 인간 관계의 가장 현실적인 모습이다. 우리는 모두 변화하고, 성장하고, 다른 방향을 향한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는 동행자가 되고, 누군가는 기억이 된다.
사람을 만나는 법과 놓아주는 법은 결국 같은 질문으로 돌아온다.
이 관계 안에서 나는 나로 존재했는가. 상대를 소유하려 하지 않았는가, 혹은 스스로를 지나치게 잃어버리지는 않았는가. 이 질문에 정직할 수 있다면, 만남도 이별도 덜 왜곡된다.
성숙한 관계란 오래 가는 관계가 아니라, 제때 놓아줄 줄 아는 관계일지도 모른다.
붙잡지 않아도 존중이 남고, 떠나보내도 의미가 사라지지 않는 것. 그런 관계를 한 번이라도 경험했다면, 우리는 사람을 두려움 대신 신중함으로 만나게 된다.
사람은 결국 사람에게서 배운다.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지, 어디까지 머물러야 하는지, 언제 물러나야 하는지. 그리고 그 모든 배움의 끝에는 이 문장이 남는다. 만남에는 용기가 필요하고, 놓아줌에는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
이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 전용 콘텐츠입니다.
작가의 명시적 동의 없이 저작물을 공유, 게재 시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