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의 진정성
누군가를 말없이 기다려준다는 것. 나는 그것이 '신뢰'라고 믿고 있다.
오지 않을 가능성까지 함께 앉아 있는 일. 설명하지 않고, 재촉하지 않고 시간이 흘러도 자리를 옮기지 않는 태도. 신뢰는 약속이 아니라 의심을 접어두는 자세이다. 확인하지 않겠다는 결심 불안이 생길 때마다 도망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는 힘. 나는 묻지 않는다. 왜 늦는지, 왜 조용한지 묻는 순간 신뢰는 거래가 되기 때문이다. 기다림은 조건을 달지 않는다. 나는 살아오며 그것이 신뢰라고 믿고 있따.
신뢰는 감정이 아니라 결정에 가깝다.
좋아해서 믿는 것이 아니라, 믿기로 선택했기 때문에 관계가 유지된다. 우리는 흔히 신뢰를 따뜻한 마음이나 호의의 결과로 오해하지만, 실제로 신뢰는 훨씬 건조하고 무거운 행위다. 그것은 상대를 낙관적으로 바라보는 태도가 아니라, 배신당할 가능성을 포함한 채로 내어주는 태도다.
신뢰는 늘 공백에서 시작된다.
모르는 부분, 확인되지 않은 의도, 아직 증명되지 않은 마음. 그 빈칸 위에 우리는 조심스럽게 기대를 올려놓는다. 이 기대는 확신이 아니다. 오히려 흔들릴 준비가 된 상태다. 그래서 신뢰는 용기와 닮아 있다. 확실해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확실하지 않음을 견디며 머무는 힘.
심리적으로 신뢰는 통제의 포기다.
상대를 믿는다는 것은, 그의 행동을 완전히 관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이다. 그래서 신뢰는 불안을 동반한다. 우리는 불안을 싫어하면서도, 동시에 신뢰를 원한다. 이 모순 때문에 관계는 늘 긴장 상태에 놓인다. 신뢰는 편안함이 아니라, 불편함을 감수하는 태도다.
신뢰가 무너질 때 우리는 상대보다 자신을 더 의심한다.
“왜 믿었을까”, “내가 너무 쉽게 마음을 열었나”. 배신의 고통에는 늘 자기검열이 따라붙는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다시는 믿지 않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강해졌다는 선언이 아니라, 더 이상 상처받고 싶지 않다는 고백에 가깝다. 신뢰를 거부하는 순간, 우리는 안전해질 수는 있지만 깊어지지는 않는다.
문학에서 신뢰는 종종 말해지지 않는다.
대신 행동으로 드러난다. 등을 보인 채 잠드는 장면, 아무 설명 없이 함께 걷는 시간, 질문하지 않아도 되는 침묵. 신뢰는 말이 많아질수록 사라진다. 끊임없이 확인받으려는 관계는 이미 균열 위에 서 있다. 진짜 신뢰는 증명을 요구하지 않는다. 증명하려는 순간, 신뢰는 계약으로 변한다.
철학적으로 신뢰는 타인을 인간으로 인정하는 방식이다.
상대를 완벽하지 않은 존재로 받아들이는 것. 실수할 수 있고, 흔들릴 수 있고, 때로는 나를 실망시킬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포함한 채로 관계를 지속하는 일. 신뢰는 이상적인 인간을 향한 기대가 아니라, 불완전한 인간과 함께 살겠다는 선택이다.
그래서 신뢰는 깨지기 쉽다. 산산조각 나기 쉽고, 그 흔한 '신뢰'라는 것이 된다.
너무 많은 기대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종종 신뢰에 역할을 부여한다. 이 사람은 나를 지켜줄 것이다, 이해해줄 것이다,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신뢰는 약속이 아니다. 약속은 미래를 보장하려 하지만, 신뢰는 미래를 통제하지 않는다. 그 차이를 받아들이지 못할 때, 신뢰는 쉽게 배신으로 번역된다.
신뢰는 관계의 시작이 아니라, 과정에서 생겨나는 잔여물에 가깝다.
함께 견딘 시간, 넘어간 오해, 말하지 않아도 유지된 거리. 그것들이 쌓여 남는 감각. 그래서 신뢰는 빠르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빠르게 생긴 신뢰는 대개 빠르게 무너진다. 깊이보다 속도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는 더 어렵다.
우리는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할지, 어디서 무너질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스스로를 믿기 힘들다. 그러나 자기 신뢰란 흔들리지 않겠다는 약속이 아니라, 흔들려도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감각이다. 완벽하게 살겠다는 다짐이 아니라, 무너진 뒤의 자신을 외면하지 않겠다는 태도.
결국 신뢰는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기술이 아니라, 삶을 감당하는 방식이다.
모든 것을 확실하게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그 불확실성 속에서도 누군가와, 혹은 자기 자신과 함께 걷는 선택. 신뢰는 그래서 늘 조용하다. 과시하지 않고, 선언하지 않으며, 필요 이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신뢰는 말하지 않아도 남아 있는 감각이다.
그리고 그 감각이 사라질 때, 우리는 비로소 그것이 얼마나 무거운 것이었는지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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