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가난과 질문 사이에서 공부하던 운동권 학생들의 초상
그 시절을 한 단어로 부르기는 어렵다. 사람들은 나중에 그것을 운동권이라 불렀지만, 그 안에 있던 학생들에게 그것은 이름 이전의 상태, 아직 정리되지 않은 감정과 너무 빨리 자라 버린 질문들이었다.
강의실은 늘 반쯤 비어 있었다. 칠판에는 미분과 근대사, 구조주의와 열역학이 뒤섞여 있었지만 학생들의 시선은 창밖에 머물러 있었다. 캠퍼스 바깥에서 들려오던 사이렌, 신문 1면의 검은 활자, 어젯밤 누군가 끌려갔다는 소문. 배움은 교재보다 먼저 현실에 의해 호출되었다.
그들은 대단한 용기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이 아니었다. 대부분은 부모가 보내준 등록금으로 고시원보다 조금 나은 하숙집에서 살았고, 군대와 취업 사이의 시간을 어떻게든 미뤄보고 싶었던 평범한 스무 살들이었다.
그러나 질문 하나가 그들을 바꾸었다.
“왜 우리는 이 상황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운동은 거창한 이념에서 시작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불공평한 성적 처리였고, 다음에는 등록금 인상이었고, 그다음에는 한 학생의 퇴학,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국가라는 단어가 개인의 일상으로 걸어 들어왔다.
거대한 것은 늘 사소한 균열에서 시작되었다. 유인물은 밤에 만들어졌다. 등사기의 잉크 냄새, 손에 묻은 검은 얼룩, 한 장이라도 더 찍기 위해 종이를 아껴 접던 손길들. 문장은 투박했고, 지금 읽으면 지나치게 단정적이지만, 그 안에는 확신보다 절박함이 있었다.
설득이 아니라 생존에 가까운 언어. 그들은 자주 두려워했다. 도망치고 싶었고, 다음 차례가 자신일까 잠을 설쳤다. 하지만 두려움은 그들을 흩어지게 하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같은 두려움을 공유하는 순간 사람들은 더 단단해졌다.
연대는 용기 이전에 공포를 견디는 방식이었다. 거리에서 외치던 구호들은 지금 기준으로 보면 거칠고 단순하다. 그러나 그 단순함은 복잡한 현실을 이해할 시간이 없었던 젊은 몸들의 호흡에서 나왔다. 짧은 문장, 강한 리듬, 도망치면서도 끝까지 외치던 목소리. 그날의 외침은 세상을 완전히 바꾸지 못했지만, 그들 자신을 되돌릴 수 없게 만들었다.
운동권의 학생들은 늘 ‘시대의 대표’로 불렸지만, 실은 시대에 끌려다닌 사람들이었다. 선택했다기보다는
이미 선택된 자리에 서 있었고, 물러서기에는 너무 많은 것을 보아버렸다. 침묵은 중립이 아니라 가담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너무 일찍 배웠다.
세월이 지나 그들 중 많은 이들은 평범한 직장인이 되었고, 누군가는 정치인이 되었고, 누군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몸은 기억한다. 최루탄 냄새, 팔을 잡아끌던 손의 온기, 밤새 토론하다 잠든 교실 바닥의 차가움. 그 기억은 신념보다 오래 남는다. 그 시절의 학생들은 완벽하지 않았고, 때로는 오만했고, 때로는 서로를 상처 입혔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들이 자신의 안위보다 더 큰 질문에 몸을 먼저 내밀었다는 사실이다.
그 선택이 옳았는지보다 중요한 것은 그 선택이 그들을 다른 사람이 되게 했다는 점이다. 운동권 시절은 한국 사회의 한 페이지가 아니라 여전히 끝나지 않은 문단에 가깝다. 지워졌다고 생각한 문장들이 다른 형태로 계속 나타난다.
청년, 불안, 불공정, 분노. 단어는 바뀌어도 질문은 반복된다. 그때의 학생들은 영웅도, 희생양도 아니었다.
다만 자기 시대의 압력을 몸으로 번역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 번역은 완벽하지 않았기에 지금도 다시 읽히고, 다시 고쳐 쓰이고 있다.
시골집에 손을 벌리기 싫어 식당에서 설거지를 하던 청년들이 있었다. 물에 불은 손끝으로 접시를 쌓고, 기름 묻은 국자를 헹구며 그들은 하루의 시간을 돈으로 바꾸었다.
학비와 책값, 그리고 다음 학기를 버틸 최소한의 생활비. 꿈은 늘 먼 데 있었고, 생활은 언제나 바로 앞에 있었다. 밤이 깊어 퇴근길에 나서면 그날의 피로보다 먼저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도시의 불빛 사이로 드문드문 박힌 별들이 마치 아직 남아 있다는 신호처럼 반짝이던 때였다. 대학은 빠져나오기 어려운 시간의 방이었다.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며 누군가는 십 년 가까운 시간을 캠퍼스에 묶여 지냈다. 공부를 멈추기 위해 휴학을 했고, 다시 공부하기 위해 복학을 했다. 그 사이에 군대가 있었고, 공장이 있었고, 신문 배달과 막노동과 붉게 물든 두 눈을 비비며 밤새 읽은 책들이 있었다.
학번은 늙어갔지만, 질문은 여전히 현재형이었다. 그 긴 시간 동안 돈을 모으고, 공부를 다시 시작하고, 그리고 더 먼 곳으로 떠날 준비를 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유학이라는 말은 도피처럼 들리기도 했고 확장처럼 들리기도 했다. 여기서는 숨이 막혀서, 혹은 더 많은 언어로 세상을 읽고 싶어서.
비행기 표 값은 몇 년의 노동이었고, 출국 날짜는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각서처럼 무거웠다. 살림은 늘 빠듯했다. 하숙집의 얇은 벽 너머로 들리던 기침 소리, 라면과 김치로 버티던 저녁, 등록금 고지서를 받던 날의 침묵. 그러나 가난은 그들을 침묵시키기보다 오히려 더 많은 말을 하게 만들었다.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누가 결정했는지, 이 구조는 누구에게 유리한지. 질문은 생활비처럼 매달 필요했다. 꿈을 찾은 사람들도 있었다. 운동의 언어로 세상을 이해하게 된 이들, 학문의 깊이로 현실을 해석하려 한 이들, 혹은 아무도 대신 살아줄 수 없는 삶을 스스로 선택한 이들. 반대로, 과거의 기억에 상처가 아물지 않아
조용히 소외된 이들도 있었다. 구호보다 침묵이 익숙해진 사람들, 이름보다 번호로 불리던 시절을 몸에서 떼어내지 못한 사람들.
그러나 공통된 장면이 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늘 책이 들려 있었다는 사실. 마르크스와 베버, 한국사와 금서로 분류된 얇은 소책자들, 때로는 시집과 소설까지. 책은 단순한 공부의 도구가 아니라 세상을 다르게 살아도 된다는 조용한 증거였다.
읽는다는 행위 자체가 이미 선택이던 시절이었다. 향학열이라는 말은 그들에게 교양이나 출세를 뜻하지 않았다. 그것은 버티는 힘이었고, 자기 자신을 놓치지 않으려는 최소한의 저항이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심장은 조금 더 빨리 뛰었고, 그 박동은 거리의 구호보다 오래 남았다.
1980년대의 운동권 학생들은 역사의 중심에 서 있었다기보다 역사의 압력 아래에 있었다. 그들은 시대를 대표하지 않았다. 다만 시대가 던진 질문을 피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 질문 앞에서 어떤 이는 앞으로 나섰고, 어떤 이는 옆으로 비켜섰으며, 어떤 이는 끝내 말하지 못했다.
그 시절은 끝났다고 말해진다. 그러나 설거지통의 물 냄새, 밤하늘의 별빛, 책을 쥔 손의 감각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몸에 남아 있다.
그 기억들은 기념비가 아니라 생활 속에 묻혀 다음 질문을 기다리고 있다.
문학이 말해야 하는 운동권 학생들의 비애는 거대한 이념의 패배가 아니라, 아무도 끝까지 묻지 않아 준 삶의 세부에 있다. 운동권 학생들은 늘 ‘역사’로 불렸다.
시대의 주체, 저항의 얼굴, 혹은 지나간 과오. 그러나 그렇게 불리는 순간, 그들은 개인으로 존재할 자리를 잃었다. 문학이 말해야 할 비애는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
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의 명사로 환원된 순간, 그들의 피로와 망설임, 후회와 생활은 역사의 각주로 밀려났다.
그들은 선택한 것만큼이나 선택하지 못한 것들에 의해 만들어진 사람들이었다. 공부를 계속하고 싶었지만, 현실이 먼저 불러 세웠고, 조용히 살고 싶었지만, 침묵이 공범이 되는 시대를 살았다.
문학은 이 ‘사이’의 시간을 말해야 한다. 투쟁과 일상 사이, 확신과 공포 사이, 구호와 침묵 사이에서 계속 흔들리던 몸의 상태를. 운동권 학생들의 비애는 패배 이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가장 큰 비애는 싸우고 있는 동안조차 자신의 삶을 유예해야 했다는 사실이다.
청춘은 늘 미래로 미뤄졌고, 사랑은 사치처럼 취급되었으며, 개인의 고통은 집단의 언어로 번역되며 사라졌다. 문학은 이 번역되지 못한 고통을 다시 원래의 언어로 돌려놓아야 한다.
그들은 종종 너무 빨리 늙었다. 나이에 비해 많은 것을 보았고, 너무 일찍 타협과 배신과 좌절을 배웠다.
어떤 이는 끝까지 남았고, 어떤 이는 떠났으며, 어떤 이는 떠났다는 이유로 끝내 자기 자신을 용서하지 못했다. 문학은 그 판단을 유보해야 한다. 누가 옳았는지를 말하는 대신,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는지 조용히 따라가야 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운동권은 변화했고, 반복되었고, 때로는 스스로를 부정했다. 그러나 그 변화의 과정에서 가장 많이 탈락한 것은 사람의 이야기였다.
조직은 기록되었고, 노선은 정리되었지만, 밤마다 흔들리던 마음, 책을 덮고 한숨 쉬던 순간,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두려움은 기록되지 않았다. 문학이 말해야 하는 비애는 바로 이 기록되지 않은 것들이다.
영웅담이 되지 못한 시간, 실패담으로도 정리되지 못한 삶. 아무도 “써 달라”라고 요청하지 않았기에 끝내 쓰이지 못한 이야기들. 그러나 요청이 없었다는 이유로 사라져도 되는 삶은 없다.
문학은 구호를 대신 외칠 필요가 없다. 다만 한 사람의 시선으로 그 시절을 다시 걷게 하면 된다. 손에 책을 들고도 늘 불안했던 마음, 미래를 믿으면서도 오늘을 견디기 버거웠던 하루. 그 구체성 속에서 운동권 학생들의 비애는 비로소 인간의 얼굴을 되찾는다. 문학이 이 비애를 말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다시 한번 역사에 의해 소비될 것이다.
이번에는 반성의 대상으로, 혹은 침묵의 사례로. 문학은 그 소비를 거부해야 한다. 말해지지 않은 것을 말하고, 묻힌 것을 다시 꺼내는 일. 그것이 문학이 운동권 학생들에게 지는 가장 늦은 책임이다.
* 박노해, 『노동의 새벽』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김연수, 『사월의 미, 칠월의 솔』
이 책들을 읽고 느껴지는 것을 써보는 밤. 어느 쉬는 날. 우연히 보게 된 영화 한 편을 보고, 운동권시절의 학생들이 겪었던 비애들을 읽고 싶어 찾아본 책들이었다. 문학에서 조차 그들의 비애를 전면에 다룬 것은 없어 보인다. 80년대 운동권 학생들의 ‘비애’를 온전히 다룬 대표작은 아직 없었다. 전면으로 정확히 내세운 이야기 없다는 것이 유감이었다. 많이 팔리는 것만 써지는 문학. 그 안에서 조용히 소외되거나 묻힌 이야기는 아직도 많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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