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간단한 이치 흑과 백

반전(反轉)

by 구시안


길어 보려던 머리를 계절에 맞게 짧게 자르고 들어 선 곳은 사람이 많은 백화점이라는 곳이었다. 아무도 없을 거라는 헛된 바람과는 달리, 윙윙 거리는 벌레 한 마리도 못찾을 만큼 사람들이 즐비하다. 이곳엔 풍요와 빈곤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같다.


따뜻한 어떤 것도

빛나는 어떤 것도

향기나는 어떤 것도

눈에 들어오진 않는다.


즐거운 입맞춤으로 치장한 뺨도 무색해질 만큼 포근한 바람 속에서 봄과 여름 어느 사이처럼 신중하거나, 대담한 날개도 섬세한 살갗의 한 귀퉁이도 노래하는 팔도 자유롭게 두고, 선을 위해 악을 위해, 어쩌면 가장 간단한 이치로 흑과 백이라 칭하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다니며 사는 또 한 명의 사람일 뿐이다. 사랑이나 휴식으로 무장한 밤도 지나고, 침착한 목소리도 흥분한 입술도, 비참함도 포만감도 없이, 아주 불투명한 어떤 것도 볼수 있는 상태에서 돌아다니는 시간이 거짓말처럼 침착하다.


무거운 어떤 것도

가벼운 어떤 것도

소멸하는 어떤 것도

영원한 어떤 것도 없는

닳고 낡을 새로운 옷을 찾아

다니는 아주 평범한 시간.


시계는 이미

낮부터 새벽까지 맞춰져 있다.


나는 벌거벗은 불꽃을 열망하지만, 그 불꽃이 비추는 대상을 열망할 뿐이지, 이 세상에 벗고 다니는 아담이 되고 싶지는 않다. 나의 어린 유령이 두팔 속에서 미지의 섬을 향해 내 몸의 형태를 마음대로 지니게 되었지만, 미소짓는 법을 모르는 나로써는 그 섬 하나가 있을 뿐이고, 그 섬을 둘러싼 바다는 누그러진 날일 뿐이다.


공간을 오직 전율만 느끼게 한다면

솟아오르는 나의 시력을 감쌀 무언가는 반드시 필요하고, 두 눈을 뜨고 정확한 것을 보기 위해 나눠 놓은 흑과 백의 차이를 아주 잘 알고 있을 뿐이다. 이 흑과 백을 나 역시 갖고 있기에.


벨벳과 린넨을 구분해 낼 나의 시력은 여전하기에.

부서진 은과 가죽과 널빤지로 된 호의적인 집주인이 되길 바라지도 않지만, 바늘로 새겨진 우아한 벽을 입고 싶은 것은 디자이너 출신답게 사실이다.


제철의 식물과 꽃이 피는 것처럼

공기와 수액과 불타는 씨앗을 머금은

갑옷 하나를 장만하기에 충분한 계절에

가벼운 단어를 새겨넣을

눈꺼풀 아래서 익어가는

브랜드의 이름들을 신경쓰진 않았다.


내가 사랑하는 갑옷을 만나게 되면, 모든 이미지에 꼭 맞는 흑과 백이 되어 있을 것이고, 무한한 제 눈빛을 주고 도약에 달아나는 나의 무게를 버텨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엮어 주고 싶은 것을 위해

빛과 재를

수컷과 암컷의 눈과 열기를 맺어 줄 수 있는 색은

오로지 핑크빛이 아닌

흑(黑)과 백(白)이 되어야만 한다.


막연한 먹구름과

가장 평범한 하얀 구름처럼.

잃어버린 대상들이

이 모든 곳에서 날개짓을 하는 곳.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이미 이 두가지 색에

내 마음과 비슷한 노래를 하는 곳.

모든 이들에게 생명을 제공하는

흑과 백.


나는 오래전부터
세상이 복잡하다고 믿지 않기로 했다.

복잡하다는 말은
사실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만들어낸 장식일 뿐이다.


모든 것은
흑과 백으로 나뉜다.

빛이 닿은 것과
빛이 닿지 않은 것.


존재하는 것과
존재한다고 믿는 것.

그 사이에 회색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것은 단지
흑과 백이 서로를 침범하는

순간의 흔적일 뿐이다.


나는 때때로
내가 흰 쪽에 서 있는지
검은 쪽에 서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어느 쪽에 서 있든
그것이 나라는 사실이다.


아직은 선명한 눈동자를 뜨고

보는 것이다.

조금은 다른 색깔을 갖고 있는

눈동자에 힘을 주고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을

보는 것이다.


흑(黑)은 숨기지 않는다.
백(白)은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각자의 방식으로
완전하다.


그래서 나는
무언가를 이해하려 애쓰기보다
그것이 어느 쪽에 더 가까운지를
조용히 바라본다.


이것이 내가 아는
가장 단순한 이치다.

그리고 아마도,
가장 피할 수 없는 방식으로
나를 살아가게 만드는 원리다.

아주 간단한 이치.

낮과 밤처럼.



목,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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