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하지 않는 것이 힘이다

흩어지는 밤 속에서 나를 붙드는 것들

by 구시안

고요.

소리 없이 느리게 걸어서

비의 밧줄 위로

나는 마치 밤바람처럼

자리한다.


비치는 렌즈의 빛으로부터

나를 풀어

순간의 풍경을 담고 앉아

어떤 근심도 나누지 않고

고스란히

서랍 안에 넣어 둔다.


밤이 나와 어울려 지내는 곳

밤에 인적 없는 바닷가를 거닌다.

시간은 가늠하기 어려웠고

순간들은 연결되지 않은 채로 이어진다.

내 머릿속으로 마치

역사의 희미한 요약본처럼

지나간다.


산다는 것은

계속 달라진다는 것이다.

어제 느낀 것을

오늘 느낄 수 없다는 것이

나에게는 다행이다.


내일의

모습은

또 다른 모습일 테고,

새로 만들어진 눈으로

새로움이 가득한 광경을

보게 될 것을 알지만,

사람들을 살게 만들었던

모든 생각과 사람들이

죽게 만들었던 모든 감정이

나 홀로

내 안에서 고통스럽기를.


인생은 빠르고 슬프다.

밤바다의 파도 소리는

밤의 소리다.

어둠 속에서

희미한 거품처럼

흩어지고 마는

영원한 희망처럼

들리기도 하는

원하는 것을 얻은 자들의

환희 눈물을 흘리는 듯

떨어지는 빗방울이

밤과 심연이

바닷가 산택에서 내게

비밀을 털어놓는다.


이보다 더 정확하게 현실의 풍경을 볼 수 있는 것처럼, 나는 무언가를 위에서 내려다보듯이 나의 꿈을 천천히 되짚어 본다. 담뱃불을 붙여 무의식적으로 담배를 피우다가 재를 떨어뜨리고서, 거무스름한 흔적에게 아침이 오길 기다리라고 말한다. 모든 것이 공허해 보였고 문제가 무엇이든 답이 없으리라는 싸늘한 예감까지.


인생에 대해 말할 수 없게 방해하는 것이 바로 인생이다. 무슨 미학적인 개념인지는 나 자신도 잘 모르겠으나, 나로부터 너무 동떨어져 있는 조각상처럼 그런 인생을 만들었다. 고귀한 척도 싫지만, 우스꽝스러운 꽃을 피우는 이름을 정해야 할 이상한 꽃은 되기 싫다.


이미 시간 속에 숫자들은 바뀌었고, 내게 불운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고, 엄청난 즐거움을 경험할 수도 있겠지만, 아득히 먼 곳의 기차가 느리게 나아가는 플랫폼까지 뻗어 나 버린 나이가 발목을 잡기 시작한다. 선명하고 불가피하겠지만 저무는 태양의 미학정도로 나를 칭한다면 재수 없어 보일 수 있겠으나, 되도록 꾸려가기 위한 방법과 모색은 여전히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고, 아직은 그 미로를 잘 훑고 지나가고 있다.


나에겐 원하지 않는 것이 힘이다.

여행은 느낄 줄 모르는 이들이나 하는 것처럼

누군가의 경험을 풀어놓은 책자에 의지하고 싶지는 않다.


보편과 특수.

보편의 묘사.

인간의 영혼과 경험.

공통점.

그것을 묘사하는 것.

낮과 밤이 흘러가는

더럽게 광활하고 광대한 저 하늘.

신선한 물이 흐르지 않는 도시.

세상 근원의 어머니라고

불리기도 하는 형체 없는 밤.

괴물인 운명.

지성을 지녔으나 공기인형에 불과한 사람들.

아담과 이브의 후손이라면

누구나 이해하는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언어가 사실이라고

누가 감히 말을 할 수 있을까.


나는 나에게로 가는 길에서 멀어져

천천히 걷기로 한다.

함께 가는 길에서 추방되어

같은 일상이 반복되는

평온과는 영영 멀어지기로 한 시점에

어쩌면 그렇게 걷다 보면

지구의 끝에 도착하게 될

새로운 땅을 볼지도 모른다는

작은 추상적인 심연 속을 거닌다.


정체.

다급함.

답장.

유용하고 쉬운 일.

낙서를 휘갈길 뿐

아무것도 쓰지 못할 때까지.

일어나는 일을

지켜보듯 할 것이다.

무수한 날들이 지나고

이 정체 상태에서 벗어날 때면

전혀 다른 옷을 입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운명이 명령하고

우연이 결정하는 대로

따르고

잊힌 약속을 충실히

지키면서.

분개하지 않기로 한다.

누군가가

봐주지 않아도

나약한 자라서

그저 불평만 하기엔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

스스로

내 꿈들을

더 아름다워 보이도록

배열하여 각기 제 자리에 놓는다.

멀리 밀어낼 수 있을 때까지.


강렬한 불빛이 잠시 눈을 시리게 하고

잠시 동안의 적막.

잠시 치는 천둥소리.

가까이서 들렸다가

멀어지면서

이상하게도

마음을 안심시키는 밤에

나는 두쪽의 폐 전체로 깊은 숨을

몰아 쉬고 있다.


두꺼운 종이를 급히 넘기는 소리만이

고요한 바닷가처럼

적막하게 빛이 나는

나만의 밤의 소리를 만들고 있다.


은은한 빛.

밝은 폭풍.

마음에 이는

바다 위로.

그 바다 위로.

나이테를 새겨가는

사시나무 한그루가

심장을 멈춘다.

원하지 않는 것이 힘이다.



목,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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