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치지 않으려 합니다
나는 스스로를 회피형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갈등을 지나치게 두려워하는 사람이었다. 불편한 말, 감정이 예민해지는 순간, 목소리가 높아지는 대화, 그런 상황이 오면 몸이 먼저 반응했다. 심장이 빨리 뛰고 손끝이 찌릿해지고 숨이 얕아졌다. 그러면 나는 습관처럼 한 가지 선택을 했다. "피하자."
언젠가 인터넷에서 이런 글을 봤다. "회피형 남자친구는 연애에서 최악이다." 그 글 아래 댓글들이 주르륵 달려 있었다. "인정. 내 전남친이 딱 이거였음" "대화가 안 되니까 답답해서 미치는 줄" "회피형은 그냥 연애하지 마세요" 읽으면서 얼굴이 뜨거워졌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연애를 하던 시절 나는 정말 그랬으니까. 나참, 댓글 속 '전남친'이 나일 수도 있겠네.
문제가 생기면 말하고 풀어야 하는데, 나는 그 문제를 없애버리려고 노력했다. 갈등을 해결하려는 게 아니라 갈등이 '없는 것처럼' 만들고 싶어 했다. 구체적으로 말해볼까. 어느 날 여자친구가 물었다. "요즘 왜 이래? 뭔가 이상한데." 나는 알고 있었다. 요즘 내가 거리를 두고 있다는 걸. 불안해서 연락도 뜸하게 하고, 만나자는 말에도 핑계를 댔다는 걸. 하지만 대답은 이랬다. "아니야, 별일 없어. 그냥 좀 피곤해서." "진짜야? 뭔가 있는 것 같은데." "진짜 없어. 걱정하지 마." 거짓말이었다. 있었다. 많았다. 하지만 말하지 못했다.
왜 말하지 못했을까? 말하면 싸울 것 같아서. 싸우면 관계가 끝날 것 같아서. 내 감정을 솔직하게 말했다가 "너 너무 예민한 거 아냐?" 하는 말을 들을까 봐. 그래서 선택한 문장들이 있었다. "미안. 그냥 내가 잘못했어." "아냐 괜찮아. 별거 아니야." "좀 시간 지나면 나아질 거야." 이 말들의 공통점은 하나다. 대화를 시작하지 않는 말이라는 것. 상대는 내 진짜 감정을 모르고, 나는 상대의 감정을 확인하기가 무서웠다. 얼굴을 마주 보는 것도 솔직하게 말하는 것도 혹시 실망하게 만들까 봐 두려웠다. 지금 생각해 봐도 회피형 남자친구는 최악이다.
기억에 남는 날이 있다. 토요일 오후, 연인과 카페에 앉아 있었다. 공기가 무거웠다. 며칠째 이어진 어색함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우리 대화 좀 하자." 여자친구가 먼저 말을 꺼냈다. "... 응." 나는 커피잔만 만지작거렸다. "요즘 네가 뭘 생각하는지 모르겠어. 나랑 있을 때도 딴생각하는 것 같고." 맞는 말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 없었다. 몸만 있었지 마음은 도망가 있었다. "미안해. 요즘 일이 좀 많아서." 또 핑계였다. "일 때문만은 아닌 것 같은데. 나한테 뭔가 불만 있어?" "아니야." "그럼 뭐야? 말 좀 해봐." "... 그냥, 나도 모르겠어." 정말 몰랐다. 내가 왜 이러는지. 왜 말을 못 하는지. 왜 자꾸 도망치고 싶은지. 그렇게 침묵만 이어졌다. 연인은 한숨을 쉬었고, 나는 계속 커피잔만 만졌다. 그날 헤어지지는 않았지만, 그날이 시작이었다. 천천히 무너지는 관계의.
그 관계는 결국 끝났다. "너랑 있으면 외로워." 마지막에 들은 말이었다. 그 말이 제일 아팠다. 함께 있는데 외롭다니. 그게 나 때문이라니. 연애가 끝난 뒤 나는 한동안 나를 '비겁한 사람'이라고 여겼다. 왜 대화하지 않았을까? 왜 아프다는 말 하나, 힘들다는 말 하나 못했을까? 왜 상대를 혼자 상처받게 내버려 뒀을까? 혼자 다시금 생각했다. '나는 정말로 최악의 남자친구였구나.'
그때는 몰랐다. 그게 단순한 성격 문제가 아니라 불안과 연결된 패턴이었다는 걸. 정신과에서 의사가 물었다. "갈등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하세요?" "음.. 주로 피합니다." "왜요?" "무서워서요." "뭐가 무서운데요?" "그냥... 이유는 잘 모르겠어요." 나는 싸우는 게 무서운 게 아니었다. 싸운 뒤 버려질까 봐, 실망하게 할까 봐, 내가 열등하다는 사실이 드러날까 봐. 그게 너무 두려웠던 것이다. "회피는 방어기제예요. 당신을 지키려는 거죠. 나쁜 방법이긴 하지만 그때의 당신에겐 그것밖에 없었던 거예요."
나는 이제야 깨달았다. 회피는 관계를 지키지 못한다. 회피형 인간은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한다. "내가 감정을 드러내면 상대방이 떠날지도 몰라." 하지만 현실은 반대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아서 떠난다. 말하지 않아서 상처받고 표현하지 않아서 소외감을 느낀다. 몸은 가까운데 마음은 멀어져 버린다. 나는 그걸 뒤늦게 알았다. 나중에서야, 이미 끝난 후에야. 에라이, 왜 진작 말을 안 했을까.
지금은 조금 다르다. 완벽하게 바뀌진 않았다. 여전히 갈등이 무섭고, 불편한 대화는 피하고 싶다. 하지만 예전처럼 무조건 도망치지는 않는다. 지난주 동료와 의견 충돌이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아, 네. 그렇게 할게요" 하고 넘어갔을 텐데, 이번엔 말했다. "저는 조금 다르게 생각하는데, 제 의견도 들어봐 주시겠어요?" 손이 떨렸다. 심장이 빨리 뛰었다. 하지만 말했다. 그리고 세상은 무너지지 않았다. 동료는 "아, 그런 생각도 있네요. 좋은데요?" 했다. 그게 전부였다. 나참, 이게 이렇게 간단한 거였어?
말을 하는 건 여전히 어렵다. 누군가 "요즘 어때?"라고 물으면 아직도 "괜찮아"라고 먼저 답한다. 하지만 이제는 그다음이 있다. "사실은 좀 힘들긴 한데." 그 한마디를 더 붙인다. 완벽하지 않지만 그래도 시작이다. 회피형 인간의 성장은 느리고 조심스럽다. 하지만 멈춰 있는 건 아니다. 나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예전에는 말하지 못했던 것들을 이제는 조금씩 말한다. 두려움이 사라진 건 아니지만 두려움으로부터 도망치지 않으려 한다. 이 변화가 남들에게는 작아 보일지 몰라도 내게는 크다. 아주 큰 걸음이다.
언젠가 다시 누군가를 만나게 되면, 그땐 조금 다를 것 같다. 완벽한 사람이 되진 못하겠지만 적어도 도망치지 않는 사람은 될 수 있을 것 같다. 불편한 대화도 피하지 않고 감정도 솔직하게 말하고 "미안해" 대신 "사실은 이렇게 느꼈어"라고 말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 하나. 누군가에게 버림받을까 봐 두려워도, 나까지 나를 버리면 안 된다는 것. 오늘도 나는 도망치지 않으려 한다. 완벽하진 않지만 노력하는 중이다.
"용기란 두려움이 없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 넬슨 만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