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각자의 전쟁을 치르는 중이다
병원을 다닌 지 1년이 넘어가니 생긴 변화가 하나 있다. 이제 더 이상 모자를 푹 눌러쓰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대기실 구석진 자리가 아니라 정수기 옆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아 멍하니 사람들을 구경하는 여유가 생겼다는 것이다. 소위 말하는 '고인물'이 된 건가. 나참, 이런 걸로 고인물이 되고 싶진 않았는데.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바닥 무늬만 셌다. 누가 나를 볼까 봐, 혹시라도 아는 사람을 마주칠까 봐 전전긍긍했다.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마스크를 끼고, 구석 자리에 웅크리고 앉았다. '제발 아무도 나 알아보지 마.' 그게 유일한 바람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남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을. 다들 자기 안의 소란을 잠재우느라 바쁘니까. 그 안전한 무관심 속에서, 나는 조심스럽게 타인을 관찰한다.
흥미로운 건 정신과 대기실이 생각보다 평범하다는 사실이다. 영화에서 보던 것처럼 소리를 지르거나 혼잣말을 하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도서관처럼 고요하다. 하지만 그 고요함 속에는 저마다의 사연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다.
내 맞은편에는 갓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대학생이 앉아 있다. 에어팟을 꽂고 스마트폰을 보고 있지만, 다리를 끊임없이 떨고 있다. 면접을 앞둔 취준생일까 아니면 학점과 미래의 무게에 짓눌린 청춘일까. 그 떨림이 내게까지 전해져 오는 것 같아 마음속으로 작게 응원을 보낸다. '나도 그때 참 많이 떨었어. 괜찮아, 별일 없을 거야.'
창가 쪽에는 말끔한 정장을 입은 40대 남자가 앉아 있다. 누가 봐도 번듯한 대기업 차장님 포스다. 손목에는 비싸 보이는 시계가 있고, 틈틈이 업무 전화를 받으며 "네, 처리하겠습니다"라고 깍듯하게 말한다. 겉보기엔 성공한 직장인. 하지만 전화를 끊고 나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마른세수를 한다. 아마도 회사에서는 '강철 멘탈'로 불릴지도 모른다. 그가 여기서만큼은 그 갑옷을 잠시 벗어두고 쉬다 갔으면 좋겠다.
그리고 가끔은 백발이 성성한 할머니도 오신다. "아유, 잠이 안 와서 왔어." 간호사에게 건네는 말투가 정겹다. 육체의 아픔만큼이나 마음의 외로움도 나이가 들면 더 깊어지는 걸까. 어쩌면 이 할머니는 나보다 훨씬 오래 이곳에 다니셨을지도 모른다. 수십 년을 버텨오신 거다. 그 생각을 하니 마음이 숙연해진다.
예전의 나는 생각했다. 정신과는 '마음이 약해빠진 사람들'이 오는 곳이라고. 나 자신도 그렇게 여겼다. '나는 약한 사람이구나. 정신력이 부족한 사람이구나.' 하지만 1년간 이곳을 지켜본 결과, 내 생각은 완전히 틀렸다. 이곳은 약한 사람들이 오는 곳이 아니다. 오히려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가느라 마음이 닳아버린 사람들이 오는 곳이다. 너무 열심히 살아서. 너무 잘하고 싶어서. 남들을 배려하느라 정작 나를 돌보지 못해서. 그렇게 애쓰던 사람들이 잠시 숨을 고르러 오는 '인생의 피트스톱' 같은 곳이랄까.
"OOO님~" 내 이름이 불렸다. 진료실로 들어간다. "요즘 어때요?" "네, 그럭저럭요." 5분간의 짧은 대화. 다음 예약. 대기실을 나가는데 아까 그 대학생이 아직 앉아 있다. 정장 입은 남자는 벌써 나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아마 다시 전쟁터 같은 회사로 복귀했겠지. 이름이 호명되면 사람들은 진료실로 들어간다. 들어갈 때의 표정은 무겁지만, 나올 때는 미세하게나마 어깨가 펴져 있다. "오늘도 버텨보겠습니다." 무언의 선언 같기도 하고.
병원 문을 나서니 찬 바람이 분다. 옷깃을 여미며 지하철역으로 향한다. 대기실에 앉아 있던 그 대학생도, 정장 입은 남자도, 할머니도, 그리고 나도. 내일은 조금 덜 불안하길. 아니, 불안하더라도 무너지지 않고 출근할 수 있기를. 문득 생각한다. 우리 서로 말은 안 했지만, 다들 꽤 멋진 사람들이라고. 아프다고 숨지 않고,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나아지려고 용기 내어 이곳까지 온 거니까. 1년 전의 나에게 말해주고 싶다. '모자 쓰고 숨지 않아도 괜찮아. 여기 있는 사람들 다 너랑 똑같아. 그리고 1년 후엔 너도 정수기 옆에 당당히 앉아 있을 거야.' 에라이, 사는 게 다 비슷하지 뭐. 우리는 모두 각자의 전쟁터에서 승리하는 중이다.
"친절하라. 당신이 만나는 모든 사람은 당신이 모르는 전투를 치르고 있다." - 플라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