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과 동거한 지 1년 2개월의 기록
처음 병원 문을 열고 들어갔던 날로부터 정확히 1년 2개월이 지났다. 그때 나는 의사에게 간절하게 물었었다. "선생님, 저 언제쯤 완치될까요?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을까요?" 1년이 지난 지금, 누군가 같은 질문을 한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글쎄요. 완치는 모르겠고, 그냥 살아가고는 있습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드라마틱한 반전은 없다. 나는 여전히 아침마다 약을 먹는다. 눈 뜨면 습관적으로 물 한 컵을 따르고 손바닥에 알약을 털어 넣는다. 가끔 약통을 보며 생각한다. '이걸 언제까지 먹어야 할까.' 의사 선생님은 "서서히 줄여볼 수 있어요"라고 희망을 주지만, 나는 기억한다. 멋모르고 약을 끊었다가 3주 만에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던 그때를. 그 추락의 감각이 여전히 등 뒤에 서늘하게 남아있다. 그래서 무섭다. 평생 약이 없으면 안 되는 사람이 될까 봐.
여전히 불안하다. 중요한 업무 PT 전날엔 잠을 설치고 모르는 번호가 뜨면 가슴이 철렁하고 회식 자리에선 언제 빠져나갈지 눈치를 본다. 불안이라는 녀석은 1년이 지나도 짐을 쌀 생각이 없어 보인다. 아주 뻔뻔한 장기 투숙객처럼. 여전히 나 자신에게 가혹하다. '이 정도면 잘했어'라는 칭찬보다는 '더 잘할 수 있었는데'라는 아쉬움이 먼저 튀어나온다. 나참, 1년이나 지났는데 사람은 참 안 변한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주 미세한 균열들이 생겼다. 긍정적인 쪽으로.
출근을 한다.
1년 전의 나는 하루 20시간을 잤다. 잠이라기보다는 기절에 가까웠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 게 에베레스트를 등반하는 것보다 힘들었다. "누가 나 좀 안 죽여주나?" 그런 끔찍한 생각을 이불속에서 매일 했다. 지금도 아침은 힘들다. 하지만 일어난다. 씻고 옷을 입고 현관문을 나선다. 무너지지 않고 하루를 시작한다. 그 당연한 일상이 내게는 기적이다.
점심시간의 고요. 예전엔 혼자 밥 먹는 게 두려워서 싫은 내색도 못 하고 무리에 섞였다. 관심 없는 드라마 얘기에 영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빈 교실이나 차 안에서 혼자 도시락을 먹는다. 외롭지 않은 혼자. 남들의 시선보다 내 마음의 평화가 더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됐다. 45분의 고요함이 나를 충전시킨다.
'솔' 톤의 가면을 벗다. 전화벨이 울리면 여전히 긴장한다. 하지만 예전처럼 목소리를 '솔' 톤까지 억지로 끌어올리지 않는다. '미'나 '파' 정도면 충분히 예의 바르다는 걸 안다. 침묵을 못 견뎌 횡설수설하지도 않는다. 상대방의 침묵은 화난 게 아니라 메모하는 중일 거라고, 빈칸을 믿음으로 채워본다.
고개를 들다. 병원 대기실 구석에서 바닥 타일 무늬만 세던 내가, 이제는 정수기 옆자리에 앉아 사람들을 본다. 다리를 떠는 취준생, 한숨 쉬는 직장인. '다들 각자의 전쟁을 치르고 있구나.' 그 사실이 묘하게 위로가 된다. 나만 힘든 게 아니라는 안도감.
말의 무게. "바빠 죽겠다"는 말을 습관처럼 하던 내가, 이제는 멈칫한다. 죽음이라는 단어의 무게를 알기 때문이다. 정말 죽을 만큼 힘든 게 아니라면, 그 말은 아껴둔다.
도망치지 않는다. 갈등이 생기면 "미안해" 하고 숨어버리던 회피형 인간. 지금도 도망치고 싶다. 하지만 심장이 터질 것 같아도 말은 한다. "제 생각은 조금 달라요." 떨리는 목소리라도 내뱉고 나면 알게 된다. 세상은 무너지지 않는다는 걸.
별거 아니지만, 나에게는 혁명이다.
"불안장애는 고혈압이나 당뇨처럼 평생 관리하는 병이에요." 의사의 그 말이 처음엔 사형 선고 같았다. 평생 환자로 살아야 한다니. 하지만 이제는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안경을 평생 쓴다고 해서 환자라고 슬퍼하지 않듯이, 나도 마음의 시력이 나빠서 약이라는 안경을 쓰는 거라고. 약을 먹어서라도 밥을 먹고, 출근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웃을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한 대가를 치르는 거라고.
1년 전의 나는 완치를 꿈꿨다. 불안이 0이 되는 상태. 지금의 나는 안다. 불안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내가 다룰 수 있는 크기로 작아지는 것뿐임을. 여전히 약을 먹고, 여전히 불안하지만, 나는 살아있다. 무너지지 않고 버티고 있다.
치유는 어느 날 갑자기 팡파르와 함께 오는 게 아니었다. 오늘 약을 챙겨 먹는 것. 싫어도 출근하는 것. 전화를 피하지 않고 받는 것. 도망치고 싶지만 자리를 지키는 것. 그 사소하고 지질한 하루들이 쌓여 1년이 되었고,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다.
앞으로의 1년은 어떨까. 아마 여전히 약을 먹고 있을 것이다. 여전히 가끔은 울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보다는 조금 더 단단해져 있겠지. 넘어지는 횟수는 비슷해도, 일어나는 속도는 빨라져 있겠지. 1년 전에는 내일도 안 보였는데, 이제는 내년이 궁금해지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나는 완치되지 않았다. 다만, 살아가는 법을 배웠을 뿐이다. 그리고 그거면 됐다.
"상처는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상처와 함께 사는 법을 배울 뿐이다." – 무라카미 하루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