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구원한 건 긍정의 힘이 아니라 고무장갑이었다
불안은 생각보다 끈질기다. 특히 주말 오후나 잠들기 직전,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때 이 녀석은 틈을 비집고 들어온다. 처음엔 작은 걱정으로 시작한다. '내일 회의 준비 다 했나?' 그러다 꼬리에 꼬리를 문다.
'발표하다가 실수하면 어쩌지?' '저번에도 팀장 표정 안 좋던데.' '나 찍힌 거 아닐까?' 순식간에 머릿속은 재난 영화의 한 장면이 된다. 몸은 침대에 누워 편안한데, 뇌는 이미 전쟁터 한복판이다.
한번 빠지면 허우적댈수록 더 깊이 빠져드는 늪. 예전의 나는 그 늪에서 빠져나오려고 머리로 싸웠다. '생각하지 말자.'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괜찮아, 별일 아니야.' 하지만 그럴수록 불안은 더 선명해졌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마"라고 하면 코끼리만 생각나는 것처럼. 나참, 머리로는 안 되는구나.
그러다 우연히 발견했다.나를 구원하는 건 긍정적인 사고가 아니라, 고무장갑이라는 것을. 어느 날, 숨이 잘 안 쉬어질 만큼 불안했던 날이었다. 침대에 누워 천장만 보고 있었는데, 심장이 너무 빨리 뛰었다. 에라 모르겠다. 벌떡 일어나 싱크대에 쌓인 설거지를 시작했다. 차가운 물을 틀고, 수세미에 세제를 묻혀 그릇을 닦았다. 뽀드득 소리가 날 때까지 헹구고, 건조대에 차곡차곡 쌓았다. 15분 정도 지났을까. 신기하게도 심장이 진정되어 있었다. 머릿속의 재난 영화가 일시 정지된 느낌이었다. '어? 이게 되네?'
그날 이후, 나는 불안이 찾아오면 무조건 몸을 움직인다. 나만의 '행동 처방전'을 만든 것이다. 의사 선생님이 처방해준 게 아니라, 내가 직접 부딪히며 깨달은 생존법이다.
내 방 상태는 내 마음 상태와 똑같다. 마음이 어지러우면 방구석에 먼지가 쌓인다. 책상 위에는 종이들이 널브러져 있고, 침대 밑에는 정체 모를 물건들이 굴러다닌다. 그래서 역으로 접근한다. 방을 치우면 마음도 닦이지 않을까? 물티슈를 한 장 뽑는다. 창틀의 먼지를 닦고, 책상의 얼룩을 지운다. 힘주어 닦다 보면 미간에 들어갔던 힘이 손끝으로 이동한다. 세상일은 내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다. 사람 마음도, 업무 성과도, 내 미래도 내 통제 밖에 있다. 그 불확실성이 나를 미치게 만든다. 하지만 이 먼지는 내 뜻대로 닦을 수 있다. 이 얼룩은 내가 힘을 주면 지워진다. 청소는 내가 내 삶을 아주 조금이라도 통제할 수 있다는 감각을 되찾아준다. 깨끗해진 책상을 보면 묘한 성취감이 든다. '그래, 적어도 내 방 하나는 내가 다스릴 수 있잖아.' 그 작은 효능감이 불안을 밀어낸다.
도저히 집 안에서는 해결이 안 될 때, 운동화를 신는다. 목적지는 없다. 그냥 걷는다. 왼쪽, 오른쪽, 왼쪽, 오른쪽. 발바닥에 닿는 땅의 감각, 뺨을 스치는 바람, 규칙적인 숨소리에만 집중한다. 걷다 보면 복잡했던 생각들이 발바닥 밑으로 빠져나가는 기분이 든다. 뇌가 쉴 새 없이 떠들 때는, 몸을 힘들게 해서 뇌의 입을 다물게 하는 게 최고다. 30분쯤 걷고 들어오면, 아까 나를 괴롭히던 고민이 조금은 가볍게 느껴진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죽기야 하겠어?' 하는 배짱이 아주 조금 생긴다. 몸을 움직여 앞으로 나아가는 행위 자체가 '정체된 마음'을 뚫어주는 것 같다.
마음이 소란스러울 땐 서랍을 연다. 뒤엉킨 양말을 짝 맞춰 개고, 널브러진 책들을 키 순서대로 꽂는다. 컴퓨터 바탕화면의 아이콘을 폴더별로 정리하기도 한다. 혼란스러운 것들을 제자리에 돌려놓는 과정. 그건 마치 헝클어진 내 생각들을 가지런히 하는 의식과도 같다. "이건 여기, 저건 저기." 물건들이 질서 정연하게 자리를 잡으면, 엉켜있던 내 불안도 조금씩 제자리를 찾아가는 느낌이다. 불안은 무질서에서 온다. 그러니 눈앞의 무질서를 질서로 바꾸는 것만으로도 마음은 한결 차분해진다.
나는 이제 안다. 불안할 때 가만히 누워있는 건,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하는 것과 같다는 걸. 생각은 생각으로 제어할 수 없다. 생각은 행동으로만 끊을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움직인다. 우울하면 빨래를 돌리고, 불안하면 화장실 청소를 한다. 화가 나면 걷는다. 남들이 보면 "무슨 청소를 그렇게 열심히 해?" 하겠지만, 나는 지금 마음을 닦는 중이다. 찌든 때를 벗겨내듯 불안을 닦아내고, 엉킨 마음을 개어 넣는 중이다.
청소를 끝내고 깨끗해진 방에 앉아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신다. 여전히 내일은 걱정되고 미래는 불투명하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이 공간만큼은 깨끗하고 정돈되어 있다. 그거면 됐다. 오늘 하루치 불안은 이걸로 퉁치자. 혹시 지금 불안해서 이 글을 읽고 있다면, 일단 핸드폰을 내려놓고 눈앞에 보이는 쓰레기 하나만 버려보시라. 신기하게도, 그 작은 움직임이 당신을 구할 것이다. 나를 구했듯이. 에라이, 기분도 꿀꿀한데 창틀이나 닦아야겠다.
"행동이 반드시 행복을 가져오지는 않을지 몰라도, 행동 없이는 행복도 없다." - 벤자민 디즈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