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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함에도 체력이 필요하다

곳간에서 인심 나고, 체력에서 인성 난다

by 하루

"저 이거 한 번만 더 봐주시면 안 돼요?" 퇴근을 앞둔 시각, 동료가 서류를 들고 왔다. 평소라면 "아, 네! 이리 주세요"라고 웃으며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날은 나도 모르게 미간이 찌푸려졌다. "아… 저 지금 바쁜데. 급한 거예요?" 내 목소리에는 날카로운 가시가 돋혀 있었다. 동료는 당황한 듯 뒷걸음질 쳤다. "아, 아니에요. 내일 주셔도 돼요."


동료가 돌아가고 난 뒤, 나는 자책의 늪에 빠졌다. '왜 그렇게 말했지?' '별로 어려운 부탁도 아니었는데.' '저 사람이 나를 싸가지 없다고 생각하겠지?' 그날 밤, 곰곰이 생각했다. 나는 왜 짜증을 냈을까. 그 동료가 싫어서? 아니다. 부탁이 무리해서? 그것도 아니다. 이유는 하나였다.


지쳐서.


아침부터 긴장 상태로 업무를 처리하느라 내 에너지는 이미 바닥난 상태였다. 배터리가 3% 남은 핸드폰이 절전 모드로 들어가듯, 나도 '친절 모드'를 유지할 힘이 없었던 것이다.


문득 드라마 <미생>의 한 대사가 떠올랐다. 장그래의 스승이 했던 말. 예전엔 그냥 흘려들었던 그 대사가, 이제는 비수처럼 꽂힌다. "네가 이루고 싶은 게 있다면 체력을 먼저 길러라. 네가 종종 후반에 무너지는 이유, 대미지를 입은 후에 회복이 더딘 이유, 실수한 후 복구가 더딘 이유, 다 체력의 한계 때문이야." 그 대사를 다시 찾아 읽으며 무릎을 탁 쳤다. 내가 불안에 쉽게 무너지는 이유, 남들의 말 한마디에 하루 종일 휘청거리는 이유, 오후만 되면 예민해져서 가시를 세우는 이유. 내 인성이 나빠서가 아니었다. 내 정신력이 약해 빠져서가 아니었다. 그저 체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불안은 연비가 나쁜 차와 같다. 불안장애를 가진 사람은 가만히 있어도 에너지를 쓴다. 남들이 1의 에너지로 숨 쉴 때, 우리는 10의 에너지를 써서 긴장한다. 뇌는 끊임없이 최악의 상황을 시뮬레이션하고, 심장은 이유 없이 빨리 뛴다. 아침에 출근하면서부터 '오늘 실수하면 어쩌지', 회의 시간에 '내 말이 이상하게 들리면 어쩌지', 점심시간에도 '저 사람이 나를 이상하게 보는 건 아닐까'. 그러니 오후 3~4시만 되면 방전되는 게 당연하다. 체력이 떨어지면 몸은 비상사태를 선포한다. "지금 힘드니까 아무도 건드리지 마!" 그래서 가장 먼저 차단하는 게 '다정함'이다. 남을 배려할 여유, 웃어줄 힘, 한 번 더 들어줄 인내심을 셧다운 시켜버린다. 나참, 다정함도 체력이 필요하구나.


나는 그동안 착한 사람이 되려고 마음수련을 했다. 책을 읽고, 명상을 하고, '참아야지' 다짐했다. "나는 좋은 사람이 될 거야. 남한테 짜증 내지 말아야지." 그렇게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건 순서가 틀렸다. 체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다정함은 그냥 억지일 뿐이었다. 내가 오후 5시에도 웃으면서 동료를 대하고 싶다면, 집에 가서 가족에게 짜증 내지 않고 싶다면, 마음을 다잡을 게 아니라 허벅지를 단련해야 했다. 에라이, 그동안 엉뚱한 곳에 힘을 쓰고 있었네.


그래서 나는 운동을 시작했다. 살을 빼기 위해서가 아니다. 멋진 몸매를 뽐내기 위해서도 아니다. 나는 다정해지기 위해 운동을 한다. 퇴근 후 헬스장에 가서 러닝머신을 뛰고, 스쿼트를 한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때마다 생각한다. '이 근육은 내일 오후 4시의 짜증을 막아줄 방패다.' '이 땀은 내일 회의 시간의 불안을 버텨줄 연료다.' 처음엔 힘들었다. 운동화 끈을 묶는 것조차 귀찮았다. 하지만 억지로라도 했다. 불안할 땐 몸을 움직여야 한다는 걸 알았으니까.


신기하게도 체력이 조금 붙으니 마음의 맷집도 늘어났다. 예전 같으면 심장이 쿵 내려앉을 상사의 지적에도 "아, 시정하겠습니다" 하고 넘길 힘이 생겼다. 동료의 갑작스러운 부탁에도 "네, 제가 할게요"라고 웃을 여유가 생겼다. 인격이 훌륭해진 게 아니다. 그냥 체력이 좋아진 거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 말처럼, 체력에서 인성이 나온다. 어제도 그랬다. 오후 4시쯤, 동료가 또 부탁을 했다. "이것 좀 봐주시면 안 돼요?" 예전 같았으면 미간이 찌푸려졌을 시간이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아, 네. 이리 주세요." 진심으로 웃으면서 받았다. 배터리가 아직 50%는 남아 있었으니까.


불안장애 환자에게 운동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 필수 과목이다. 약이 화학적인 보조제라면, 운동은 물리적인 보조제다. 몸이 단단하면 마음이 덜 흔들린다. 이건 비유가 아니라 과학이다. 의사 선생님도 말했다. "운동하면 세로토닌이 분비돼요. 불안을 줄이는 데 약만큼이나 효과적이에요." 처음엔 '에이, 운동으로 뭐가 달라지겠어' 했다. 하지만 해보니 안다. 달라진다. 확실히 달라진다.


혹시 당신이 요즘 들어 부쩍 예민해졌다면, 사소한 일에 화가 나고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면, 당신의 성격을 탓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당신은 나쁜 사람이 아니라, 그냥 지친 사람일 뿐이다. 마음을 고쳐먹으려고 애쓰는 대신, 오늘 저녁에 산책이라도 30분 하고 자는 건 어떨까. 내일의 다정함을 미리 충전한다는 마음으로. 나도 아직 완벽하지 않다. 여전히 오후만 되면 피곤하고, 가끔은 짜증도 난다. 하지만 예전보다는 나아졌다. 배터리가 10%에서 50%로 늘어난 느낌이랄까. 그리고 그 30~40%의 여유가, 나를 조금 더 다정한 사람으로 만들어준다. 에라이, 스쿼트 한 세트만 더 하고 자야겠다.


내일도 웃으면서 출근해야 하니까.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 - 유베날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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