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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정 없는 목소리가 무섭습니다

전화벨이 울리면 가면을 씁니다

by 라디

"따르릉." 사무실의 정적을 깨는 벨 소리. 내 책상 위의 전화기다. 화들짝 놀라서 안 받는 척하거나 코드를 뽑아버리고 싶은 정도는 아니다. 나는 직장인이니까. "네, 감사합니다. ○○○입니다." 매끄럽게 수화기를 든다. 목소리는 차분하고 응대는 친절하다. 겉으로 보기엔 아무 문제가 없다. 하지만 내 속은 전쟁통이다.


나는 전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조금 더 솔직히 말하면 힘들어한다. 이유는 하나다.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눈치가 빠른 편이다. (라고 믿는다) 대화할 때 상대방의 눈썹이 살짝 꿈틀하는지, 입꼬리가 올라가는지, 팔짱을 끼는지 본다. 그 비언어적인 신호들을 보며 파악한다. '아, 이 사람이 내 말에 동의하는구나.' '지금은 좀 지루해하는구나.' '표정이 굳었네, 내가 뭔가 잘못 말했나?' 그 신호들을 보며 대화를 조율한다. 그게 내가 관계를 맺는 방식이고, 나를 보호하는 레이더망이다. 그런데 전화는 이 모든 레이더를 무용지물로 만든다. 오직 목소리 하나.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손전등 하나 들고 길을 찾는 기분이랄까.


통화 중에 2초 정도 정적이 흐를 때가 있다. 얼굴을 보고 있다면 그가 고개를 끄덕이거나 메모를 하고 있다는 걸 알 텐데, 전화상에서는 그 2초가 2시간처럼 느껴진다. '내가 말을 잘못했나?' '기분이 상했나?' '혹시 비웃고 있나?' 뇌회로가 순식간에 과열된다. 그래서 나는 그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쓸데없는 말을 덧붙인다. "아, 그게 그러니까 제 말은... 음, 다시 말씀드리면..." 횡설수설의 시작이다. 나참, 가만히 있으면 안 되나.


반대의 경우도 있다. 내가 오해를 살까 봐 두려운 것이다. 얼굴을 보고 있다면 눈웃음 한 번이면 해결될 긍정의 신호가 전화로는 전달되지 않는다. 무표정하게 "네, 알겠습니다"라고 하면 상대방이 '이 사람 건방지네?' 혹은 '화났나?'라고 생각할까 봐 겁이 난다. 그래서 나는 전화만 받으면 '가면'을 쓴다. 톤을 '솔'이나 '라'까지 끌어올린다. "아~ 네네! 맞습니다 선생님! 아유, 당연하죠!" 평소 내 목소리보다 두 옥타브는 높다. 과장된 리액션, 필요 이상의 추임새. 비언어적 표현이 안 보이니까 청각적인 신호로 필사적으로 외치는 셈이다. "나 당신에게 호의적이에요! 나 착한 사람이에요!" 에라이,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전화를 끊고 나면 수화기를 내려놓는 손에 힘이 빠진다. 겨우 5분 통화했는데 50분 달리기한 것처럼 기가 빨린다. 옆자리 동료가 묻는다. "누구 전화였길래 그렇게 상냥해요?" 나는 쓴웃음을 짓는다. "아니, 그냥 거래처..." 사실 별 내용도 아니었다. 그냥 서류 하나 확인하는 전화였다. 그런데 나는 왜 이렇게까지 에너지를 썼을까. 보이지 않는 상대의 표정을 읽어내려 애쓰고, 보이지 않는 내 표정을 설명하려 애쓰느라.


의사 선생님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정보가 부족하면 불안한 사람들은 그 빈칸을 부정적인 상상으로 채우는 경향이 있어요. 상대방의 침묵은 그냥 메모하는 중일 수도 있는데, 그걸 '거절'이나 '분노'로 해석하는 거죠." 빈칸을 부정으로 채우는 습관. 그 말이 정확했다. 나는 보이지 않는 상대의 얼굴을 늘 찡그린 표정으로 상상하고 있었던 거다. 왜 웃는 얼굴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까. 왜 무표정한 얼굴일 거라는 생각은 안 했을까. 하필 화난 얼굴만 그렸을까.


요즘은 의식적으로 노력한다. 전화기 너머의 침묵이 흐를 때, '상대방이 화난 게 아니라, 그냥 숨을 고르는 중일 거야'라고 생각해 보는 것. 그리고 내 목소리 톤을 억지로 '솔'까지 올리지 않아도, 정중한 '미' 정도면 충분히 예의 바르다는 것을 믿어보는 것. 어제는 급한 전화가 와서 미처 목소리 톤을 높이지 못하고 평소 말투대로 받았다. "네, 확인해서 연락드릴게요." 전화를 끊고 나서 '너무 딱딱하게 받았나?' 하고 10분 동안 걱정했다.

그런데 30분 뒤 다시 통화했을 때, 상대방 목소리는 여전히 밝았다. "선생님, 아까 확인해 주신 덕분에 잘 처리됐어요. 감사합니다." 아, 다행이다. 내 낮은 목소리가 그 사람을 화나게 하지 않았구나. 내가 상상했던 최악의 시나리오는 일어나지 않았구나.


역시 전화는 어렵다. 표정이 없어서 무섭고, 공기가 안 느껴져서 막막하다. 하지만 어쩌겠나. 나는 직장인이고, 전화는 울리는데. 요즘 세상은 메신저로 다 해결할 수 있다지만, 여전히 급한 일은 전화로 온다. 그리고 나는 받아야 한다. 에라이, 안 보이면 어때. 진심으로 말하면 목소리에도 표정이 실리겠지. 완벽하진 않아도, 조금씩 나아지는 중이니까. 나는 오늘도 울리는 전화기를 향해, 심호흡 한 번 하고 손을 뻗는다. "네, 감사합니다. ○○○입니다." 목소리 톤은... 음, '파' 정도? 그 정도면 됐다.


"의사소통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은 것을 듣는 능력이다." - 피터 드러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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