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5-(6)
그렇게 두 사람의 사랑은 시작되었고, 미진은 승헌과 일 년여간의 열애 끝에 결국 승헌의 아이를 임신하게 되었다 미진보다 열네 살이 많은 승헌은 미진의 임신 소식에 뛸 듯이 기뻐했고 하루가 멀다 하고 미진과 영미가 자취하는 원룸 문고리에 미진이 좋아하는 음식을 사서 걸어놓고는 미진에게 문자를 넣어주고는 했다.
퇴근해서 돌아와 샤워하고 늘어진 미진과 영미는 이제는 자동으로
"오늘은 승헌오빠가 뭘 걸어놨을까"하는 대화를 할 정도니 승헌의 정성이 그 정도로 대단했다.
미진은 승헌이라면 믿고 결혼할 수 있겠다 싶었다 그래도 한 일 년은 사람 변하지 않는 모습 봐왔고 술도 먹여봤지만 술은 두어 잔 이상 못 먹는 잼뱅이고 담배도 입에 못 대는 사람이니 이보다 더 착실할 수가 있는가 그리고 따로 중독된 것 없어 보이니 말이다 어린 얘들처럼 게임에 중독될 사람도 아니었다. 미진은 승헌을 철석같이 믿고 승헌과 같이 살기로 했다.
둘은 먼저 같이 살 집을 얻었고, 동거부터 시작했다 이미 임신을 한 상태였기 때문에 살면서 결혼식을 올리기로 한 것이다. 배가 더 불러오기 전에 결혼식을 올렸으면 하는 게 미진의 마음이었지만 그런 미진의 기대와 달리 불행은 예고 없이 닥치는 것이었다.
"딩동"
"누구세요"
"여기 박승헌님 댁이죠?"
"네, 맞는데요"
"세무서에서 나왔습니다 문 열어주세요"
문을 열자마자 들이닥친 사람들은 험상궂은 아저씨들 여럿이었다 그들은 세무서가 아니라 사채업자 들었다. 승헌은 친구와 함께 한다는 컴퓨터 대리점 사업을 하면서 빚을 지게 된 것이었다.
결국 그날 밤 미진은 승헌과 머리를 맞대고 문제를 헤쳐나가기로 했다. 그동안 미진이 결혼식비용으로 쓰려 아껴 둔 지참금을 모두 빚을 갚는데 쓰기로 하고 결혼식은 얘 낳고 나중 살면서 올리기로 결정했다. 지금 중요한 건 이 어려움을 둘이 어떻게 헤쳐나가는지였다. 미진은 결혼식에 대한 로망도 없었고 그저 뱃속의 아이가 무사히 잘 태어나 주는 것 그리고 승헌과 함께 아이를 잘 키우는 것만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그것만이 미선의 행복을 보장해 주는 것 같았다.
세월은 흘렀고 첫째 딸에 이어 둘째 딸도 태어났고 미선은 승헌과 함께 빚을 갚아나가며 열심히 살고 있다. 한의사가 꿈이라는 공부를 여간 잘하는 큰 딸과 아이돌이 꿈이라는 못 말리는 작은 딸 덕에 미선은 그동안 열심히 산 보람을 조금이나마 보상받는 느낌을 간간이 받곤 한다
그렇게 지내 던 어느 날
따르릉.’
“여보세요.”
“미진아, 이모야. 너희 엄마가 죽었다. 그래도 너희 엄마인데… 가봐야 하지 않겠니?”
미진은 너무나 먹먹했지만 지금 드는 이 감정이 슬픔인지 뭔지 도대체 뭐라 규정할 수가 없는 느낌이었다.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보편적 사실로서는 슬퍼할 수 있지만 미진에게 엄마는 여느 평범한 엄마와 다르기 때문이었다. 엄마역할을 해준 적도 없었고 엄마라고 불릴 자격도 없다고 생각했지만 도리상 가보기는 해야 할 것 같았다. 결국 미진은 같이 가겠다는 승헌도 뿌리치고 혼자서 전주로 향했다 그리고 언니들과 이모에게 물어 함께 빈소가 차려진 병원으로 향했다.
상주는 그 집 아들이 맡고 있었다. 그곳에서 미진과 언니들은 그저 빈소에 조문하러 온 손님일 뿐이었다. 조용히 상주와 맞절하고 민지와 언니들은 빈소를 떠났다. 솔직히 영정사진도 마주 볼 마음이 안 났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무슨 암으로 돌아가신 거라고 하는데 속으로는 우릴 버린 벌을 받은 거란 생각밖에 안 들었다. 미진은 생각했다. 여기까지 와서 '나는 결국 엄마와 화해하지 못하고 가는구나' '엄마는 살아생전 자식들에게 상처 준 마음을 풀고 가지 못했구나'하는 생각이 들어 오히려 미진은 자기 자식들에게 상처 없이 잘 키워내리라 마음의 다짐을 하게 되었다
집에 돌아와서 미진은 두 딸들을 꼬옥 안아주었다 "내 새끼들....."
아이들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른 채 엄마 품에 얼굴을 묻었다. 그 작은 체온이 미진을 현실로 붙잡아 주고 있었다.
엄마는 끝내 엄마가 되지 못한 채 떠났지만, 미진은 이제 알 것 같았다. 자신은 다르게 살 수 있다는 것, 아니 이미 다르게 살아왔다는 것을.
미진은 아이들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리며 마음속으로 말했다.
여기서부터는 내가 엄마다.
상처는 여기서 끝내자고.
그날 이후로 미진은 더 이상 과거를 붙들지 않았다.
사랑했고, 속았고, 견뎠고, 지켜냈다.
그것이면 충분했다. 미진의 삶은 그렇게, 조용히 다음 세대로 흘러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