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6
순천역 플랫폼.
“잘 가고….”
“그래, 잘 있어. 연락 자주 할게.”
“응, 사랑해.”
“나도.”
기차가 움직이기 전, 지선은 태현의 뒷모습을 길게 보지 않았다. 이별의 순간을 오래 붙잡아 봐야 결국 더 많은 말을 만들어낼 뿐이라는 걸, 지난 세 번의 이별이 이미 가르쳐주고 있었다.
지선과 태현은 순천에서 3년을 함께 보냈다. 몇 번의 계절이 바뀌는 동안 특별할 것 없는 하루들이 쌓였고, 그 속에서 사랑이 자라났다. 그러나 어느 날 예고 없이 발표된 태현의 발령 소식.
울산.
지도 위의 도시 이름 하나가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되었다.
태현은 본래 서울 사람이었다. 직장 때문에 내려와 가족과 떨어져 홀로 지내던 외로움 속에서 지선을 만났다. 그래서일까. 태현이 순천을 떠나는 날, 지선이 가장 먼저 떠올린 건 자신보다 태현의 외로움이었다
. “거기 가서 좋은 친구 있으면 만나도 돼.”
그 말은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오래 고민한 끝에 내뱉은 말이었다.
“나 질투 안 해. 네가 외롭지 않게 해 줄 사람이 있다면, 친구로 지내.”
그게 믿음이었는지, 자기 위로였는지 그때의 지선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사랑은 믿어주는 일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믿음은, 종종 가장 먼저 부서지는 것이었다. 어느 추운 겨울날, 지선은 태현에게 평소처럼 메시지를 보냈다.
‘추워졌다. 밥은 먹었어?’
답장은 오지 않았다. ‘바쁘겠지’ 하며 스스로를 달래다가도, 휴대폰을 들었다 놨다 하길 여러 번. 그러다 문득 떠올랐다. 태현의 카카오톡이 두 개라는 사실 — 휴대폰용과 집에서 가끔 켜던 태블릿용.
지선은 별생각 없이 태블릿을 켰다. 답장을 재촉하려는 마음 반, 이유 모를 불안 반이었다. 하지만 카카오톡을 켜자마자, 대화창보다 먼저 보인 것은 낯선 여자의 얼굴이었다.
그 여자는 지선이 아니었다.
사진은 더 있었다.
태현과 그 여자가 서로를 안고 웃는 모습, 한복을 입고 다정하게 나란히 선 모습.
순간 지선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눈물이 터졌지만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다.
“카톡 배경에 있는 여자… 누구야?”
잠시의 침묵.
“지난번에 말한 친구야. 그 친구가 집에 왔을 때 태블릿을 만졌나 봐.”‘친구.’
그 한 단어는 잔인할 만큼 많은 걸 감추고 있었다.
지선은 더 묻지 않았다. 모든 설명이 이미 끝났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날 밤, 지선은 울지 않았다. 대신 아주 오래 생각했다.
사랑이 끝나는 순간은 언제인지,
그리고 믿음이 언제부터 배신이 되는지. 새벽에야 지선은 결론을 내렸다.
사랑은 믿음이지만, 그 믿음이 상대의 선택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지선은 마지막 메시지를 남겼다.
“네가 둔 친구 나도 둬야겠다. 외롭지 않게. 순천에서.”
그날 이후 태현에게서 답은 오지 않았다. 순천의 밤은 여전히 조용했고, 사랑이 떠난 자리만이 천천히 비어갔다.
시간은 오래 흘렀다. 지선은 순천을 떠나지 않았다. 그곳은 사랑이 끝난 자리이자 여전히 삶이 이어지는 곳이었다. 그렇게 혼자 남는 연습을 하던 어느 날, 지선은 영광을 만났다.
그들은 처음엔 친구였다. 서두르지 않았고, 과거를 캐묻지도 않았다. 함께 걷고, 말없이 같은 풍경을 바라보았다.
지선은 천천히 알았다 — 다시 사랑이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영광과의 관계는 평온했다. 불안하지 않았고, 증명할 필요도 없었다. 지선은 누군가를 믿고 있었고, 그 믿음이 자신을 단단하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낯선 전화가 걸려왔다.
“오랜만이지. 나야, 태현.”
지선은 당황하지 않았다.
“응,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한번 볼 수 있을까? 할 말이 있어.”지선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영광에게 모든 걸 말했다. 그리고 물었다.
“만나도 될까?”
영광은 잠시 침묵하다 물었다.
“그 사람을 만나면, 어떤 말을 하고 싶어?”
“무슨 말을 하든… 이제는 흔들리지 않을 것 같아.”그 답에 영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녀와. 마음 정리하고 와.
혹시 분위기 안 좋으면 바로 연락해. 언제든 데리러 갈게.”그 따뜻한 신뢰 속에서, 지선은 진짜 사랑이 어떤 것인지 깨달았다. 며칠 뒤, 지선은 태현을 마주했다.
“그 친구라는 사람, 정말 생겼어?"
“응.”
태현은 한참 말을 잇지 못하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 시작할 수 없을까?”
그의 눈엔 눈물이 맺혀 있었다. 예전처럼.
하지만 지선의 마음은 고요했다.
“네가 후회하는 건 이해해. 하지만 그 후회가 다시 시작하자는 이유는 될 수 없어.”
차 안에는 긴 침묵이 흘렀다. 지선이 덧붙였다.
“나는 지금 누군가를 믿고 있고, 그 사람은 나를 믿어. 그건 네가 돌아와서 흔들 수 있는 관계가 아니야.”
차가 순천 시내로 들어설 무렵, 지선은 천천히 말했다.
“잘 지내.”
그리고 문을 열고 내렸다. 뒤돌아보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지선은 영광에게 전화를 걸었다.
“끝났어.”
“응.”
짧은 대화였지만, 모든 감정이 담겨 있었다.
그날 밤, 지선은 오랜만에 깊이 잠들었다.
꿈도 미련도 없었다. 이제 지선은 안다.
사랑은 붙잡는 사람이 아닌, 선택하는 사람의 몫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번에는,
그 선택이 자신을 향해 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