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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서의 무게

전략기획 팀장 일기 4편

by 초연

전략기획실에서 가장 자주 듣는 말이 있다.

“보고서 하나 작성하면 되는 거잖아요?”


그러나 그 ‘하나’의 보고서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데이터와 사람, 심리와 눈치,

그리고 책임이 움직이는지는

아마 만들어본 사람만 안다.


오늘은 그 보고서가

누군가의 결정과 회사의 방향을

가른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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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9시, 단 한 문장을 두고 멈추다


회의 시작 10분 전,

나는 보고서 마지막 페이지를 붙잡은 채

한 문장을 몇 번이나 고쳐 쓰고 있었다.


“리스크는 관리 가능한 수준입니다.”


이 문장은 CEO에게 안도감을 줄 수 있는 문장이다.

하지만 과연 사실일까.


리스크는 숫자로는 관리 가능해 보였지만,

현장의 분위기, 파트너사의 흔들리는 보고 일정,

베트남 법인의 내륙수출 문제 같은 변수들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전략기획팀장은

“괜찮다”라고 말하는 순간에

누군가의 불안을 덜어주는 동시에

그 말에 대한 책임을 가져간다.


그래서 나는 그 문장을 다시 고쳤다.


“현재 확인된 범위 내에서는, 관리 가능한 수준입니다.”


단 세 단어가 추가됐을 뿐인데

보고서의 무게가 달라졌다.

그 순간 나는 다시 느꼈다.

전략은 단어의 기술이기도 하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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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실의 온도는 언제나 숫자보다 먼저 변한다


회의가 시작되자

첫 장을 넘기기도 전에

임원들의 표정이 달라졌다.


숫자는 냉정했지만,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자료를 설명하며

표정을 읽고, 상황을 확인하고,

발언의 강도를 조절했다.


“만약 이 시점에서 환율이 흔들리면

법인의 원가가 다시 상승합니다.”


“그러면 계획했던 CB 발행 일정에도

영향이 생기겠군요?”


CEO가 물었다.


나는 숨을 고르고 말했다.


“가능성은 있습니다.

다만 현재까지는 대비가 가능합니다.”


회의실 공기가 조금 식었다.

사람들은 늘 숫자보다

‘확신의 온도’를 먼저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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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원의 목소리는 대개 회의가 끝난 후에 들린다


회의가 끝나자

팀원 한 명이 조용히 말했다.


“팀장님, 오늘 발표… 솔직히 좀 무서웠어요.”


그의 손에는

내가 고쳐 쓴 그 문장이 프린트된 종이가 들려 있었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무서운 게 맞아.

그 무서움을 느낄 때 좋은 보고서가 나와.”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가 말한 ‘무서움’은

단순히 발표의 긴장감이 아니었다.


보고서 하나에 실리는

‘조직의 방향’과

‘회사의 내일’ 때문에 느끼는 무게였다.


전략기획팀장은

그 무게를 덜어주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함께 버텨야 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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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책상 위에 남은 건 단 한 줄


업무가 모두 끝난 뒤

나는 책상에 남아

오늘의 보고서를 다시 꺼내 읽었다.


종이 위의 문장들은

고요했지만

그 안에는 하루의 시간과

수많은 결정들이 녹아 있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보고서란 무엇일까?”


회사에서는 방향을 정하는 도구이고,

CEO에게는 결정을 내리는 근거이며,

팀원에게는 하루의 노력이 담긴 기록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 모든 것을 지나서

‘책임의 흔적’에 가깝다.


전략기획팀장은

보고서를 쓰는 사람이 아니라,

보고서에 책임이 붙는 사람이다.


그걸 알고 난 뒤부터

나는 어떤 문장도 쉽게 쓰지 않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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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집으로 가는 길에서


야근을 마치고 사무실을 나서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CEO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오늘 보고 좋았어요.

불필요한 과장 없이, 현실을 정확히 짚어줘서.”


그 문장을 읽는 순간

오늘 하루 묵직했던 어깨가 조금 가벼워졌다.


나는 짧게 답했다.


“네, 오늘은 이게 최선의 방향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엘리베이터를 타며 생각했다.


전략기획자의 일은

버텨낸 하루가 쌓여

조직의 방향이 되는 일이다.


그리고 내일도

또 하나의 말을 고르고,

또 하나의 문장을 다듬으며

회사의 내일을 만드는 하루가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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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한 줄

전략은 화려한 슬로건보다,

보고서 한 줄에 담긴 책임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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