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략기획 팀장 일기 3편
전략기획실의 가장 어려운 일은 ‘결정’이 아니라 ‘평가’다.
무언가를 결정하는 일보다, 누군가를 평가하는 일이 훨씬 더 많은 에너지를 소모한다.
오늘은 그중에서도 가장 피하고 싶던 날이었다.
팀원들의 분기 성과 평가일.
목록엔 몇 명의 이름이 나란히 있었다.
각자의 수치와 업무 결과가 정리된 엑셀 시트,
성과 지표, 일정 준수율, 리스크 관리 점수,
그리고 보고서 제출 건수까지.
숫자는 언제나 솔직했다.
하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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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표에는 나오지 않는 것들
한 팀원은 지난 분기 동안 베트남 법인 일정 문제로
거의 매일 밤 10시까지 남아 있었다.
그의 성과표에는 ‘리드타임 준수 실패’라고 적혀 있지만,
나는 그 뒤에서 그가 감당한 압박과 협상, 긴장을 알고 있다.
다른 팀원은 보고서 완성도는 조금 떨어졌지만,
신규 투자 검토 프로젝트에서
가장 먼저 현장에 뛰어들었던 사람이었다.
그의 성과표엔 ‘기여도 중간’이라고만 적혀 있다.
성과표는 사실을 담지만,
진실을 전부 담진 않는다.
전략기획팀장이라는 자리는
그 “사이”를 읽는 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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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가 냉정해질 때, 사람은 어떻게 지켜야 할까
오후 회의에서 성과 등급을 조정하는데,
임원 한 분이 말했다.
“성과는 성과대로 보죠.
팀원들 고생한 건 알지만, 결과가 전부니까.”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 말이 전부는 아니었다.
전략기획은 늘 성과와 과정 사이에서 줄타기 한다.
성과를 무시할 수는 없지만,
과정을 모른 척할 수도 없다.
나는 천천히 말을 꺼냈다.
“결과를 반영하되,
이 결과를 만든 과정도 함께 봐야 합니다.
특히 이번 분기는 변수가 많았고,
각자가 버틴 시간이 있습니다.
성과 하나만 보면 누군가는 억울할 수 있어요.”
잠시 정적이 흘렀다.
누구도 반박하지 않았고, 누구도 쉽게 수긍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 침묵 속에서 나는 알았다.
조직을 지키는 일은 논리뿐 아니라 정서로도 이루어진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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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장님, 저는 어느 정도까지 해야 할까요?”
평가가 끝난 뒤,
가장 성실했던 팀원이 내 자리로 찾아왔다.
“팀장님, 솔직히 좀 지치네요.
제가 어디까지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그 말은 성과보다 훨씬 더 무거운 말이었다.
조직에서 지친다는 건,
일 자체보다 ‘대가와 정서의 균형’이 흔들렸다는 뜻이다.
나는 오래 고민하다가 말했다.
“네가 할 수 있는 만큼 하되,
네 마음이 부서지지 않을 만큼만 해.
성과는 회사가 판단하지만,
너의 한계는 네가 정해야 해.”
그는 조금 놀란 듯 나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나는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전략기획팀장은 회사를 위한 전략도 짜야 하지만,
사람이 버틸 수 있는 전략도 함께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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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에 인간을 더하는 기술
저녁이 되자
오늘 평가한 성과표들을 다시 읽어보았다.
숫자는 그대로였지만,
나는 그 숫자들 사이에 숨어 있는 표정을 떠올렸다.
- 보고서 내기 직전 무너질 듯한 얼굴
- 마지막 순간까지 조율하던 목소리
- 회의실 밖에서 혼자 정리하던 손동작
- “팀장님, 이건 제가 해볼게요”라고 말하던 조용한 용기
성과표엔 이 모든 것이 빠져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들을 지울 수 없었다.
전략기획팀장의 역할은
인간의 숨을 빼앗지 않는 숫자를 만드는 일이다.
조직이 사람을 소모하지 않고,
사람이 조직에 묻히지 않게 하는 일이다.
그건 어느 보고서에도 적히지 않지만,
전략기획이 전략기획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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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빈 사무실 한가운데에서
모니터를 끄고 의자에 기대어 잠시 눈을 감았다.
오늘 하루 동안 나는
사람을 숫자로 보지 않기 위해
숫자를 더 깊게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조용히 적었다.
“전략은 회사의 내일을 위해 존재하지만,
평가는 사람의 오늘을 지켜야 한다.”
내일도 또 다른 숫자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 숫자들의 진짜 무게는
사람들이 어떻게 버티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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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한 줄
숫자는 회사의 언어지만,
사람은 그 언어 사이에서 살아가는 존재다.
전략은 그 둘을 동시에 붙잡는 기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