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의 유산, 아기와 만날 수 있을까

매년 반복된 유산, 그 기억의 조각들

by 끄적

2021년 11월, '내 생애 마지막 연애다'라는 확신이 든 남자와 서른이 되기 직전, 스물아홉의 나이에 결혼했다.


강도 높은 일상이었지만, 일이 주는 행복감이 내 삶의 대부분이라 느낄 만큼 나는 일에 몰두해 있었다.

그리고 이 남자와 함께라면 아이가 없어도, 둘이서만 살아도 충분히 행복할 거라 믿었다.


몸과 마음이 지쳐가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일과 학업을 병행했고, 남편과 단둘이 잘 먹고 잘 살아갈 미래를 그려 나갔다.


순탄함으로 가득 메꿔졌던 계획에 처음으로 빨간불이 켜진 건 결혼 3년 차가 되던 2023년 6월이었다.


몸살기운이 있었고, 평소와 달리 물맛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하루 2리터 정수를 마시는 습관이 있었는데, 잘만 마시던 물이 떫고 역하게 느껴졌다.

이 이상함의 정체가 궁금해 점심시간에 편의점에서 임신테스트기를 사 왔다.

그리고 곧바로 확인했다.


명백한 두 줄.


날짜를 계산해 보니 딱 하루, 피임 없이 관계한 날이었다.
그 하루가 역사가 되었다.


부모가 된다는 사실은 기쁨보다 두려움이 먼저였다.

‘나 아직 준비 안 됐어.’
‘부모가 되는 거 아직 너무 무서운데…’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채웠다.


하지만 뱃속에서 울리는 심장소리를 들은 날, 마음은 완전히 달라졌다.

'나 정말 엄마가 되나 봐.'

살면서 처음 느껴본 종류의 벅참이었다.

사회적으로 나에게 붙어있던 수많은 이름표 중 '엄마'가 하나 더 추가되었다며 기뻐했다.


태명은 '꽁꽁'으로 지었다.

남편이 연애 때부터 나를 부르던 애칭이었고, 내가 가장 좋아하던 애칭이었다.

그 애칭을 태어날 아기에게 물려주고 싶었다.

태아보험을 알아보고, 산후조리원을 알아보고 바쁜 시간 속 행복을 누렸다.


한층 더 자랐을 꽁꽁이를 보러 간 산부인과 진료 날.


7주 4일,

태아 심장이 안 뛴다, 멈췄다는 선생님의 말.


그 말을 들은 순간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초음파실에서 옷을 추스르며 '심장이 안 뛴다는 게 이게 무슨 말이지?'라는 생각만 맴돌았고

자세한 설명을 듣기 위해 의사 선생님 앞에 앉자마자 한참을 울다 겨우 진료실을 나왔다.


진료실 밖에 있는 산모들에게 나의 유산 사실을 간접적으로도 알리지 않기 위해 애썼다.

진료실에서 눈물을 억지로 닦아낸 후 의연하게 병원을 나왔고,

집으로 가기 위해 차에 올라탄 순간부터 집에 도착하는 순간까지 남편과 나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동시에 눈물이 터져 하염없이 울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남편과 둘이 불 꺼진 안방 침대에 누워 울다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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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 직장 상사분에게 전화를 드려 유산이 됐다고 말씀드리고 5일간의 유산휴가를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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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하루는 둘 다 몸과 마음 위에 바위가 내려앉은 것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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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음 날, 심장을 멈춘 태아를 제거하는 소파술을 위해 수술대기실에 누웠다.

이 대기실은 분만장과 가까운 장소에 있어서 방금 세상에 나온 우렁찬 아기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부럽기도 했고, 임신을 유지해 출산까지 해낸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그 여성이 너무나도 대단하고 존경스러웠다.


한편,

옆 침대에서는 소파술을 막 마친 누군가가 '내 애기.. 너무 후회돼요 너무 아파요'를 반복하며 오열하고 있었다.


생명의 탄생과 소실이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동시에 일어나는 공간.

아름답고도 슬픈 오묘한 감정 속에서 나도 소리 없이 울었다.

첫 유산은 내 생활 전반에 큰 회의감을 안겨줬다.




첫 유산은 내 삶 전체를 흔들었다.


'내 인생에서 중요한 게 뭔데', '이게 다 무슨 의미가 있지?'


그토록 좋아했던 일들이 부질없이 느껴졌고, 유산의 원인은 '나'라며 탓하기 바빴다.

나를 탓하다가도 살아야겠는지 그 시기에 나를 너무도 힘들게 했던 '직장'을 탓했다.

잦은 야근, 업무강도가 너무 높았던 직장.

나에게 극도의 스트레스를 한껏 주었던 일터를 탓했다.

이렇게 탓하지 않으면 내가 무너질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유산에 대한 상처는 조금은 옅어져 갔다.

정확히 말하면 옅어지려 노력했다.

다음의 건강한 아기를 맞이하려면 내 몸도, 마음도 회복하는 게 우선이었다.

그리고, 먹고살려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했다.

"저 괜찮아요."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안 괜찮았지만 수십 번 말하니 괜찮아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안간힘을 써 유산을 겪은 상처를 가슴 한 켠으로 밀고 밀어 고이 묻어두었고,

나는 다시 열정 넘치는 '나'로, 일상생활로 돌아갔다.


그렇게 2023년 6월, 자연임신이 되었다.

7주 4일 유산되었다.






유산의 경험은 부부에게 상처를 남기고, 시간이 지나도 상흔은 여전히 남아있다.

또 아기를 갖고 싶은 마음은 커지나, 또 한 번의 상처를 겪을까 두렵다.



일과 대학원 공부를 병행하던 2024년 9월, 또 한 번의 자연임신.

첫 번째 유산 이후로 피임은 진즉에 관뒀다.

어느 날, 역사는 또 한 번 써졌다.

지난 임신과 달리 너무나도 기뻤다.

한 아이의 부모가 된다는 사실에 한 번 더 기회를 얻은 느낌이었다.


이전 임신보다 더 조심히 생활했다.

하지만, 7주 0일 유산.


임신 2번, 유산 2번, 출산 0회가 가져온 상처는 너무나도 컸다.

이전보다 더 심하게 '잘못'과 '원인'을 찾기 위해 애썼다.

잘못과 원인의 종착지는 '나'였다.


'내가 회사에서 무거운 물건을 들어서.'

'못 끝낸 일을 집까지 가져와 밤까지 해서.'

'커피 마시면 안 되는데, 커피를 한 잔 마셔서.'


그러나 의사들은 같은 말을 했다.

"초기 유산은 염색체 자체의 문제였을 가능성이 높아요. 누구의 잘못도 아니에요."


되묻고 싶었다.


내 몸에서 일어난 일인데,

정말 누구의 잘못도 아닌가요?


2024년 9월, 자연임신이 되었다. 7주 0일 유산.

뱃속에 머물러있는, 발달이 멈춘 태아를 꺼내는 소파술로 또 한 번의 임신과 유산이 끝났다.






회복 후 두 번의 유산 원인을 찾고 싶어 난임병원에서 습관성 유산 검사를 받았다.

한 달여 각종 검사를 진행 후 알게 된 잦은 유산의 원인을 특정할 수 있었다.


극난저.

AMH수치 0.13,

50대에 가까운 난소 기능.


가장 큰 문제는 나에게 있었다.

나의 난소 안에는 남아있는 난자가 거의 없다.


그 수치를 들은 순간

'청천벽력'이라는 사자성어를 처음으로, 진심으로 이해했다.

내 인생 첫 '청천벽력'이었다.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생겼나에 대한 끝없는 억울함,

여성으로서의 기능을 잃은 것만 같은 수치심,

나와 같은 곳을 바라보는 남편에 대한 미안함,

아기가 없는 삶도 생각해야 했던 막막함,


그리고 무엇보다 컸던 건,

과거로부터 이 상황을 만들어왔다는

나에 대한 자책과 슬픔.


"이건 누구의 잘못도 책임도 아니에요."


지나온 유산 때부터 수없이 들어왔던 그 말을

이 상황에서도 똑같이 들었다.


정말 누구의 잘못도 아닌가

내 몸에서 일어난 일인데

과연 나에게는 책임이 없을까.


진단 후 한 달은 나사 빠진 사람처럼 자기 연민에 빠져있었다.

그럼에도 다시 살아가려면 자기 연민에 머무르기보다는 현실적인 판단과 행동이 필요했다.

나의 삶도 중요했고, 나의 선택에 영향을 받는 남편을 위해서,

가족을 위해서 나는 나 자신을 놓을 수 없었다.


사라져 가는 나의 난자를 하나라도 붙잡고 싶어 바로 시험관을 시작했다.

그리고 일이 너무 좋았던 여성은,

'지금 할 수 있는 걸 하자'라는 마음으로 일을 쉬기로 했다.

과감한 퇴사, 과감한 시험관 시술 시작.


2025년 7월, 시험관 시술 4차 만에 임신이 되었다.

'이번엔 다를 거야. 잘 될거야.'

아이와 함께 할 우리 부부의 미래를 그리며 행복을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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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 7주, 엄청난 출혈과 함께 세 번째 유산이 되었다.




우리 부부는 아기와 만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