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지키기 위해 예민해졌다
어릴적부터 예측 가능한 것을 선호해왔다.
계획을 세우면 그 안에서 움직였고,
조금이라도 틀어지면,
그 상황을 받아들이고
대응을 준비할 시간을 꼭 필요로했다.
약 20년 동안 그렇게 살아왔다.
그런 성격 덕인지(혹은 탓인지),
지금껏 세워둔 계획이 조금은 변경되는 일이 있었어도
틀어지다 못해 아예 비틀려버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난임 진단을 받기 전까지는 말이다.
내 난소가 약하다고? 설마.
그래서 유산이 반복됐을 확률이 높다고? 설마.
예상치 못하게 다가온 난임 진단은
이성과 감성 사이를 마음대로 넘나들었다.
암흑 속에서 답을 찾으려는 사람처럼
나는 3개월 간 깊은 고민 속을 헤맸다.
그리고 내린 결론.
오랫동안 다니던 직장을 퇴사하고
시험관 시술 과정을 걷는 전업주부가 되었다.
전업주부라고 해서 한가로운 건 아니었다.
오히려 매일이 바빴다.
전업주부로 지낸 약 1년의 시간동안,
내 삶에서 가장 크게 바뀐 건
인간관계를 바라보는 관점이었다.
건강도, 상황도
내 뜻대로 흘러가던 과거의 나는
'좋은 게 좋은 거지.' 라며
만나면 마음이 불편한 관계까지 모두 포용하려 했다.
이런 표현이 맞을까,
범죄자만 아니면 다 받아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가장 힘들 때
그 민낯이 드러난다고 했었나.
난임과 시험관 과정을 겪으면서,
나에게 정말 중요한 관계와
그렇지 않은 관계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지금 내 곁에는 최소한의 사람들만 남아있다.
억지로 정리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걸러졌다.
난임 진단을 받고 시험관 진행하면
뜻하지 않는, 생각해보지 않았던 상황들이
계속해서 일어난다.
임신을 위해 할 수 있는 걸 모두 하고 있음에도
될지, 안 될지를 또 불안해하며
무수한 경우의 수 늪에 빠져든다.
생리주기, 난포성장, 난자채취,
배양, 착상전 유전검사까지..
그 어느 하나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과정이다.
내 몸 속을 직접 들여다보고 어떻게 되고 있는지
확인할 길이 없으니 더욱 불안해지는 마음.
이런 과정 하나하나에 잘 될까? 잘 안 될까?를
생각하며 신경을 곤두세우면,
저절로 예민해질 수 밖에 없다.
조급해지거든.
그 예측불가한 일들이 예민함을 만들어낸다.
다른 사람들이 지나가듯이 하는 말들이
나에게는 가시 돋친 말로 다가와,
나의 마음에도 가시가 달린다.
나의 그 가시 달린 마음이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시험관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은,
시험관을 하는 사람에게 어떤 말을 해줘야 할지 고민한다.
마음을 담아 해줄 수 있는 말은
"힘내, 잘 될거야." 임을 잘 안다.
그 말이 와닿지 않을 때가 많다.
이 또한, 나의 예민함 때문이지.
예민함.
예민함이 정말 나쁘기만 할까?
예민함으로 똘똘 뭉쳐 가시가 달린 내 마음이
때로는 순기능을 할 때도 있다.
불편했던 관계를 끊어내는 것에 미련이 없어졌다.
고난이 찾아왔을 때
진짜 중요한 것들이 무엇인지 선명해진다.
여유가 없는 비좁아진 마음에
정말 중요한 것들만 담아야 했기에,
그렇게 해서 중요한 것들을 지키기 위해서.
나에게 영양가 없는 것들을
미련없이 놓을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
"나중에 내 상황이 나아지고 나면,
이 관계가 끊어진 것에 후회 없을 것 같아?"
"응"
그렇다면, 나를 위해 단절한다.
나는 비로소 불편한 관계를 끊어낼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대학생 때부터 이어져오던,
내가 너무 애정해서
오래도록 놓지 못했던 친구들이 있었다.
시험관 과정 중 가장 중요한 순간,
어렵게 키워낸 배아를 내 자궁에 직접 넣는,
아기와 만날 가능성과 시간이 가장 가까워지는 배아 이식.
그 시기를 걷고 있을 때,
그동안 내가 봤어도 모른척 했던
관계의 이면이 드러나며
나의 예민함과 결합이 되었고, 그 관계의 민낯을 보았다.
나는 그 관계와 서서히 멀어졌다.
멀어지기 위해 나에게 끝없이 물었던 질문.
"나중에 내 상황이 나아지고 나면,
이 관계가 끊어진 것에 후회 없을 것 같아?"
"응"
그래서 생각한다.
예민함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지금의 상황이 만들어낸 예민함일지라도
옳고 그름을 판단하게 하고,
나에게 직접 행동할 용기를 만들어준다.
난임과 시험관도
힘들기만한 과정은 아니다.
순기능이 있다.
"그래, 나 예민한 거 맞다.
하지만
덕분에 내가 꼭 지켜야 할 것들은 지킬 수 있었다."
그 지켜야 할 것은 바로
다름아닌 '나'였다.
강하기도 하고,
쉽게 무너지기도 하는 나.
나를 지키기 위한,
그때의 나에게는
최선이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