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은 어떻게 삶을 비틀어놓는가
피츠제럴드, 꿈의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본 사람이다. 개츠비는 사랑을 꿈꿨지만
사랑은 그의 욕망이 만든 환영 속에서만 완전했다.
피츠제럴드는 한 인간의 몰락을 통해
욕망이 어떻게 삶을 비틀고, 꿈을 왜곡시키는지
정교하게 드러낸다.
욕망은 현실을 밀어내고 환상을 끌어들인다. 개츠비의 삶은 ‘현실’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믿고 싶은 환상’ 위에서 자라난 탑이었다.
욕망이 클수록 현실은 흐릿해지고
가능성은 과장되며
사실은 꿈의 속도에 밀려난다.
그는 데이지를 사랑했지만
사실 그녀보다 더 사랑한 것은
데이지를 향한 자신 안의 서사(敍事)였다.
욕망은 우리를 전진시키지만 동시에 파괴한다. 욕망은 개츠비를 빈손에서 성공으로 끌어올렸다.
하지만 성공이 그의 구원이 되지 못한 이유는
욕망이 목표를 이룬 뒤에도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욕망은 충족을 목표로 하는 감정이 아니라
무한히 자라나는 결핍의 형태다.
개츠비는 데이지와의 재회에서조차
완전한 만족을 누리지 못한다.
그는 사랑을 되찾은 것이 아니라
되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에 서 있었다.
욕망은 ‘과거’를 통해 현재를 비틀어놓는다. 개츠비가 좇았던 것은 미래가 아니라
‘과거의 어느 순간’이었다.
그런 사랑의 기억은
그의 삶을 끊임없이 뒤로 잡아당겼다.
과거를 이상화하는 순간
현재는 늘 부족해지고
사람은 지금의 자신이 아니라
과거의 자신이 만든 이야기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피츠제럴드는 독자에게 조용히 묻는다.
욕망은 우리를 어디까지 데려갈 수 있는가?
끝은 영광인가 혹은 파멸인가?
이 소설이 말하는 결론은 단순하다.
욕망은 인간을 앞으로 밀지만
끝에서 기다리는 것은
성취가 아니라 깨달음이다.
“내가 얻으려 했던 것은
본래부터 손에 넣을 수 없는 것이었구나.”
우리는 각자 마음속에 ‘데이지’를 품고 산다.
사회적 성공, 잃어버린 인정,
혹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시간들.
욕망은 나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욕망이 우리를 데려간 곳에서
우리가 잃어버리는 것이 있다면
그때 우리는 멈춰 서서 물어야 한다.
나는 지금
꿈을 향해 가고 있는가
아니면 내 욕망이 만든 허상을 따라가고 있는가.
개츠비는 우리에게 비극을 남기지만
비극은 결국
우리가 스스로를 더 정직하게 들여다보게 하는
빛의 형태이기도 하다.
Hen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