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을 통과하며 어른이 되는 일
무라카미 하루키는 조용한 결핍을 쓰는 작가였다.
그의 소설에는 거대한 사건도, 극적인 전환도 잘 없다.
대신 사람의 마음에 생기는 아주 작은 금이
어떻게 삶 전체를 흔드는지
잔잔한 파도처럼 보여준다.
<노르웨이의 숲>도 그런 소설이다.
와타나베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평범한 대학생이고
도쿄의 하숙방에서
라디오를 듣고, 책을 읽고, 술을 마시며
조용히 시간을 지나 보낸다.
그러나 그의 내면에는
말하지 않은 슬픔이 오래 머물러 있다.
친구의 죽음,
죽음이 남긴 공백,
그리고 공백 속에서 살아가는 나날들이다.
하루키는 이런 상실을
과장하거나 자신을 연민하는 방식으로 쓰지 않는다.
슬픔이란 원래
사람을 조용하게 만들고
조용함 속에서
우리는 보통보다 더 많은 것을 느끼게 된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와타나베와 나오코의 관계는
완전하지도, 안정적이지도 않다.
두 사람 모두 마음의 균열을 안고 있고
균열은 서로를 깊이 사랑하면서도
끝내 온전히 맞닿지 못하게 만든다.
사랑은 종종
우리를 구원하는 동시에
지켜내지 못한 것들로부터 상처를 남긴다.
이 소설이 그려내는 사랑은
행복보다 정직함에 가깝다.
자신의 연약함을 그대로 드러내는 일,
연약함 때문에 누군가를 붙잡지도
밀어내지도 못하는 일.
하루키는 그런 감정의 결을
폭발시키지 않고
조용히 켜켜이 쌓이게 둔다.
<노르웨이의 숲>이 시간을 지나도
사람들의 마음에 오래 남는 이유는
아마도 이것일 것이다.
누구나 한 번쯤
말하지 못한 상실 속을 걸어본 적이 있기 때문에
그리고 그런 상실을 통과하면서
조금씩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을 겪었기 때문에
레코드 바늘이 조용히 떨어지고
비틀스의 노래가 흐르는 밤,
와타나베가 느끼는 공허는
우리 모두가 어느 순간 느꼈던 그것과 닮아 있다.
음악은 흘러가지만 마음은 멈춰 있고
세상은 계속 움직이지만
내 안은 아직 어제의 그림자에 머물러 있는 상태다.
<노르웨이의 숲>은 묻는다.
사람은 상실을 어떻게 견디며
또 어떻게 앞으로 나아가는가?
답은 단순하다.
누군가의 손을 붙잡고
혹은 붙잡지 못한 손을 기억하며
천천히, 아주 천천히
자신의 속도로 걸어가는 수밖에 없다.
와타나베는 끝내
명확한 해답을 얻지 못한다.
하지만 그것이 삶이다.
삶은 언제나 해답보다는
걸어가는 사람의 자세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
하루키의 문장은
상실을 미화하지 않는다.
하지만 상실 속에서도
사람이 여전히 살아가려 한다는 사실을
조용히 비춘다.
그런 조용한 빛 때문에
이 소설은 많은 사람의 청춘에 오래 머문다.
우리는 <노르웨이의 숲>을 읽으며 깨닫는다.
어떤 상실은 사라지지 않지만
상실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일 자체가
이미 ‘전진’이라는 것을 안다.
그리고 전진이란
가끔은 그저 하루를 버티는 것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안다.
Hen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