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리 채플린, 그리고 눈물과 웃음과 윤리

그가 남기고 간 유머와 농담을 떠올리면서

by 김민율

찰리 채플린, 그리고 눈물과 웃음과 윤리




삶은 영원히 무겁지도 영원히 가볍지도 않다. 코미디 영화처럼 비극 속에 희극이 섞여 있고, 희극 속에 비극이 섞여 있다. 웃기면서 슬프고 슬프면서 웃긴, 그런 역설적인 흑백 무성 영화의 익살스러운 한 장면 속에서 유머가 시작될 때 존재의 무거움을 잠시 잊게 되는 순간이 있다.

희극배우 중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배우는 모던 타임스의 찰리 채플린이다. 그는 내게 고독하고 사랑스러운 웃음의 천재다. 중절모를 쓰고 몸에 꽉 끼는 재킷에 헐렁한 바지를 입은 방랑자. 작은 키에 지나치게 크고 우스꽝스러운 신발을 신고 펭귄처럼 뒤뚱거리며 걷는 기이한 팔자 걸음걸이. 콧수염이 난 얼굴과 엉뚱하고 유쾌한 표정, 익살스러운 몸짓으로 무언의 말을 건네는 무성영화 속 슬픔의 천재!

그의 무성영화를 본 적이 있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어느 날 문득 찾아든 뜻밖의 슬픔은 재미도 없었지만, 슬픔마저 재밌는 것으로 바꿔 버리는 내 인생에 때때로 등장하는 유일한 극중 인물 찰리 채플린. 나는 나사를 조이며 거대한 톱니바퀴에 말려들어가는 찰리 채플린을 보며 슬프다가도 웃고, 사장 여비서의 스커트 뒤에 붙어있는 나사 모양 단추를 보고 조이려 달려드는 찰리 채플린을 보고 웃는다. 슬픔에 웃음을 섞으면서 잠시 슬픔 몇 그램의 무게를 잊는다.


물질적인 존재의 바탕에는 눈물이 있다. 임종 시에 흘렸던 아버지의 눈물과‘아빠가 찐 감자를 참 좋아했는데’하시며 생전의 아버지를 생각하다 흘리던 엄마의 눈물과 염습 때 쏟아지던 우리 가족의 눈물에는 어떤 유머도 섞여들 틈이 없었다. 온몸이 눈물로만 구성된 물질 덩어리처럼 느껴지는, 그런 느낌의 세계에는 아버지의 뜻밖의 유머와 농담도 없었다. 가끔 우스꽝스러워져 우리를 웃게 만들었던 아버지가 영원히 떠났다는 것. 허공에 떠도는 먼지와 마지막 눈물 한 방울과 재의 시간 속으로 사라졌다는 것. 만질 수도 볼 수도 냄새 맡을 수도 들을 수도 없는 무감각의 세계 속으로, 부피도 질량도 없는 무의 세계 속으로 스며들었다는 것. 우리의 얼굴은 어떤 텅 빔과 슬픔으로 퉁퉁 불었고, 아버지의 몸은 물기가 마르며 풍화하여 타클라마칸 사막이 되었다.

인간을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이게 하는 것이 있다면 눈물과 웃음일 것이다. 사람이 눈물을 흘린다면 어떤 존재에 대한 슬픔과 연민을 감각했다는 것이다. 그 슬픔과 연민의 대상이 자신에게 어떤 사람으로 존재했었는지, 그 존재의 의미를 깨닫는 자만이 진정한 눈물을 흘린다. 눈물은 우리가 사람임을 잊지 않게 한다.

애도 이후에도 가끔 사라진 자에 대한 그리움으로 눈물을 흘리는 날이 있겠지만, 우리는 다시 죽음의 기억에서 반쯤 빠져나와 삶으로 돌아오기 시작한다. 저곳의 삶에서 이곳의 삶으로 돌아오는 일이 버겁지만, 어떤 삶에 대한 욕구와 의지가 우리를 다시 살아가야 할 이곳의 삶으로 이끈다.

망각하지 않으면 우리는 이번 생을 살아낼 수 없다. 엄마도 그랬다. 고향집 마당에만 나가면 아버지 손길 닿지 않은 곳이 없으니 자꾸만 생각이 나서 눈물이 쏟아진다고, 잊어야 하는데, 그래야 살 텐데 하셨다.

인간에게 망각의 능력이 없었다면 인간은 현재를 살아내기도, 지금껏 살아남기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어떤 텅 빔과 어떤 슬픔이 우리를 과거에 묶어 놓으려고 할 때, 우리는 더 생생하게 지금 이곳의 삶을 감각해야 한다. 웃어야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우리는 한동안 웃지 않았다. 그러다 엄마가 웃음을 터뜨린 날은 볕 좋은 어느 봄날이었다.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슬픔과 그리움이 옅어져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제 집에는 아버지가 없었다. 안방에 영정사진만 있었다. 어느 날 고모가 놀러 와 영정사진을 보더니 말씀하셨다.

“언니, 사진 어디다 치워요. 자꾸 보면 눈물 나고 산 사람은 살아야지요.”

그래서 엄마는 장롱 깊숙이 영정사진을 모셔두고 나름대로 씩씩하게 살아가고 있었는데, 어느 저녁에 내게 말씀하셨다.

“미용실에 가서 아줌마들과 수다 떨었는데 눈썹 문신 해주는 아줌마가 마침 와서 얼마나 웃긴 얘기를 하는지 배창지가 아프도록 웃었어. 그런데 내가 아빠를 땅속에 묻어놓고 이렇게 웃어도 되나 했다.”


눈물이 물질의 영역에 포함되어 있다면 웃음은 영혼의 영역에 속해 있다. 웃음은 만져지지 않는다. 물리적인 질량과 부피와 무게를 갖지 않는다. 소리로, 표정으로 존재의 상태를 느끼게 해 줄 뿐이다. 웃음에는 어떤 원소도, 원자도 없다. 그것은 물질적 차원을 넘어서는 어떤 영혼의 감각이다. 살아있음에 대한 감각.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있겠다는 생의 욕구와 의지에 대한 감각. 상실과 슬픔 이후에 웃지 않는 사람은 자기 앞의 생에 대한 욕구와 감각을 잠시 잃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사람은 웃을 수 있어야 한다. 웃어야만 한다. 웃었다고, 죄가 되지는 않는다.

한동안 우리는 코미디언처럼 가벼워지지 않았다. 유머와 농담이 없는 삶을 살았다. 어쩌다 텔레비전 앞에 앉아 개그 프로그램을 보거나 웃긴 얘기를 하며 웃고 나면 그 웃음에는 죄의식이 묻어났다. 애도 후에도 얼마간 웃지 않는 것. 그것은 죽은 자에 대한 예의와 윤리를 지키는 것. 먼저 떠나보낸 사람이 잠시 잊고 있었던 최소한의 인간다움의 태도였다.

아버지의 기일을 몇 해 지낸 후로 슬픔이 흐려져 갈 만할 때쯤 우리는 웃는 일을 더 이상 그렇게 죄스러워하지 않았다. 웃음은 남은 자의 삶이었고, 생에 대한 영감이었다. 이제 남은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잘 살다가 갈 것인가. 그런 질문을 떠올리게 했다.

어느 날 저녁 엄마와 전화 통화를 했다.

“엄마, 강릉 집 화장실 공사는 언제 한 대?”

“금 토 일 월, 해야 할 거라는데.”

“화장실 가는 건 어떻게 할 건데?”

“요강에다 누면 되지. 뭐.”

“똥은?”

“똥도 요강에다 누면 돼.”

“근데 그걸 어떻게 처리해?”

“땅 파고 거기다 묻으면 되지 뭐.”

“텃밭에 거름으로 주나?”

“깔깔깔깔……나는 헛간에다 요강 두고 누면 되는데 너는 토요일에 오면 어떻게 누나.”

“깔깔깔깔……그래서 엄마, 나 화장실 공사 다 끝나면 갈려고.”

“그래. 그래야지.”

그날 통화를 하고 나서 어쩌다 웃은 게 왠지 죄스러웠지만 그런 날들을 지나 우리는 잘 살아있어야 했다. 주어진 생에 대한 의무와 책임처럼.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르는 날 아침에는 초겨울비가 내렸다. 죽음은 침묵으로만 말하는 무성영화였다. 이제 아버지는 보슬비 내리던 마지막 장면 속으로 사라졌다. 찰리 채플린처럼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유머와 농담 섞인 말을 툭, 툭 내뱉던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겠지만, 흑백 무성영화 같았던 보슬비가 내리던 초겨울 아침의 작별을 잊지 않는다. 이만 하면 잘 살았다는 아버지의 마지막 말도.

모든 사람은 죽음이라는 영원한 자기 망각에 빠진 후에 모든 장면이 사라진 거대한 스크린에 여백으로 남는다. 보슬비가 배경음악으로 깔리는 생의 뒤편으로 사라진다. 마지막 장면이 끝나고, 엔딩 크레딧 자막이 스크린 위를 천천히 올라가는 사이에 하나 둘 서둘러 자리를 떠나 상영관 바깥으로 나가는 사람들이 있고,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후자였다. 어떤 풍경과 이미지가 남긴 아름다움과 여운을 조금만 더 오래 느끼고 기억하고 싶은 사람이었다.

죽은 이를 위해 남은 사람이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일은 눈물 한 방울을 바치며 그의 영혼을 다른 세상으로 잘 보내주는 일이다. 그의 죽음까지도 사랑하는 일이다. 그의 의미 있는 삶의 풍경을, 이마에 맺히던 땀방울과 어느 날 저녁에 만져 본 고목의 뿌리 같은 손의 그 모든 수고를, 묘 앞에서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기억하며 꽃 한 송이 바치는 일이다. 그가 남기고 간 유머와 농담을 떠올리면서. 좋은 곳에서 부디 잘 지내기를 기도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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