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무대 산 | 조현산 류지연
‘예술무대 산’의 공연을 처음 본 것은 <달래 이야기>다. 본 지 10년도 넘은 작품인데, 여전히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다. 무대 위에는 간결하고 단정한 무대 소품과 대소도구가 있었을 뿐이지만, 극이 진행되는 내내 그 공간은 말할 수 없는 서정적인 에너지로 가득 차 있었다. 2인이 조종하는 관절 인형 ‘달래’의 움직임에는 눈을 뗄 수 없게 하는 힘이 있었다. 그 사랑스런 아이가 아빠랑 정답게 노는 모습, 그러나 전쟁의 고통 속에 놓인 그 상황 자체가 슬퍼 관객석에서 눈물을 훔쳤는데, 그 자리에서 훌쩍거리는 사람이 나 혼자만은 아니었다. 말 한마디 없는 이 공연이 주는 감동이 너무 컸다.
평소에도 점잖은 언행과 태도로 후배 인형극인들의 존경을 받는 ‘예술무대 산’의 조현산 대표님과 류지연 미술감독님. 예전부터 주변에서 두 분의 이야기는 많이 들어왔지만, 언젠가 두 분을 만나 어떤 이야기든 하염없이 나누고 싶다는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의 상황을 말씀드리고 조심스럽게 인터뷰 요청을 드렸을 때, 두 분은 흔쾌히 수락을 해주셨다. 바쁜 일정을 쪼개 일정을 정했다. 가평에 계신다 하여 작업실을 찾아가고 싶었지만 여의치 않아, 예술인형축제를 진행하는 대학로에서 만나게 되었다.
*일시 : 2025년 10월 26일 (일) 오전 10시
*장소 : 아르코 꿈밭극장(서울시 동숭동)
*참여 : 조현산, 류지연, 김해일, 이슬기
Q. 어떻게 인형극을 시작하셨는지 궁금해요.
조현산 나 같은 경우는 진짜 운이 좋지 않았나? 그래서 지금까지 이 일을 수 있지 않았나? 중간에 하면서도 그만해야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진지하게 많이 해왔어. 나도 대형면허 있었으면 이 일 그만 뒀을 것 같아. 하지만 난 다른 재주가 없었어. 정말 난 배운 게 없었거든. 나는 어렸을 때 춤을 춰가지고, 군 입대했을 때 예술단에 있었어. 그때 동기가 ‘인형극단 어린왕자’ 박인수 대표, 마임협의회 전임회장 마임이스트 김원범이야. 인수는 군대 오기 전부터 서울인형극회 단원이었어. 하기로 했던 친구가 못 오는 바람에 그 친구 대신 나를 꼬시더라고.(웃음) 그런데 사실 내가 몸이 안 좋았어. 그때 교통사고를 당해서 팔이 안 좋아. 군 제대도 한 달 늦게 했거든. 팔이 완치도 되지 않았는데, 인형을 들고 연습하니 팔이 아픈 거야. 그래서 못하겠다고 했더니, 그때 당시 연출인 하영훈 대표가 나한테 참고 해보라고 설득을 하는 거지. 말도 못하고 아픈데도 참고 했어. 그런데 그때 지금의 아내를 만났어. 잠실 민속관에서 한 달 동안 <흥부와 놀부> 공연을 하는데, 내 역할이 뱀이었어. 그 공연은 다 녹음이라 나는 연기한다는 생각도 없었어. 이게 인형극인지 연극인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한 거야. 인형극은 인형 만들고, 만든 인형 들고 서 있으면 되는 줄 알았지. 그리고 사람들이 나보고 잘한다고 해. 그래서 진짜 잘하는 줄 알고.(웃음) 그렇게 시작이 됐어.
류지연 대학교 때 인형극 동아리 활동을 하다가, 춘천인형극제에 오게 됐죠. 방송인형극 선생님들이 제작을 잘하는 것 같아서, 거기 가면 뭔가 배울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때 ‘현대인형극회’ 대표님이 대학교 팀 중 우리 공연을 좋게 봐주셔서, 제가 배우러 가고 싶다고 했을 때 오라고 하셨고, 가서 잠깐 일하고 나왔죠. 내가 방송인형극 쪽으로 갔던 이유는 제작을 배우고 싶어서였는데, 사실 방송대기 시간이 너무 길고 내가 배우고 싶은 제작을 할 시간이 정말 없어서 결국 그만두게 된 거죠. 그러면서 나는 방송인형극보다는 무대 인형극에 더 맞다는 걸 느꼈어요. 그때만 해도 오픈해서 잘 가르쳐주는 시스템이 거의 없었죠. 기술을 숨기는 시대였어요. 그래서 배우는 데 어려움이 많았어요. 방학 때 ‘서울인형극회’에 아르바이트로 가서 일을 하면서 배웠어요. 그때 남편을 만났죠. 아무것도 모르고 했다고 하지만, 그래도 그때 하영훈 실장님이 이 분(조현산 대표)을 리더로 세워가지고, 이 분이 공연 끝나면 자체 평가를 하도록 했어요. 그때 좋게 보았죠. 자기는 여자에 관심 없다고 하고.(웃음) 그렇게 만나서 결혼을 한 거죠.
‘예술무대 산’을 창단하기 전에 공백기가 있었어요. 그때는 한 사람이 돈을 버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죠. 창단하고 나서도 얼마 안 되어 어려울 때 1년 정도 직장을 다녔어요. 어린이집에서 일하면서 아이를 데리고 다녔죠.
조현산 ‘그냥 대충 대본 써서 순서대로 등장하고 퇴장하면 되지’라는 생각을 하면서 공연을 했던 것 같아. 그래도 좋은 선배님들을 많이 만나서 어떻게든 배워서 인형극을 하고 있었는데. 생각해보면 내가 1992년부터 30년 넘게 인형극을 했는데, 그중 절반가량의 시간은 아무 생각 없이 했던 것 같아. 그러다 질문이 생기더라고. 그때부터 고통이 시작되었지. “인형극이 뭐지?” 그 순간부터 창작자로서는 고난과 역경이 왔어. 아내는 미술 전공도 아닌데, 인형을 만들면 너무 예쁘고 좋아. 그런데 하면 할수록 ‘이건 아닌데’하는 생각이 오면서 슬럼프가 시작됐어. 그래서 작품 만드는 방식을 바꿔봤어. 새로운 미술감독을 세워서 아내가 미술 보조를 해보고, 나는 새로운 연출을 고용해서 옆에서 연출을 배우고, 30대 후반부터는 배우 워크숍이나 훈련을 찾아다니며 배웠지. 전문가를 초청해서 배우기도 하고, 찾아가보기도 하고, 20대 초반 배우들과 40대인 내가 같이 뒹굴며 배우기도 했어. ‘인형극이 뭐지?’ ‘그럼 인형은 뭐지?’ ‘그럼 배우는 뭘까?’ ‘나는 왜 인형극을 하는 걸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이 구체적으로 생겼지.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는 질문이 없어. 내가 잘하는 줄 알았다니까? 그러다가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걸 알게 되었지. 인형극 시작하고 15년이나 지나서야! 그러다 절실하게 깨닫게 된 것 같아. 처음에는 어떻게 먹고 살 건지, 어떻게 극단을 운영할건지만 고민했는데, 그때부터는 창작자로서의 어려움이 같이 오더라고. 그래도 버티는 것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었어.
Q. 오랜 시간 아무 생각 없이 인형극을 하셨다는 말씀이 의외예요. ‘예술무대 산’의 작품은 초창기부터 많은 시도와 실험을 통해서 예술성을 갖춘 작품들이었다고 생각하는데요.
류지연 초창기에 <미로의 성>이라는 작품을 할 때, 그 작품의 연출이 나에게 “인형은 잘 만드는데 작품에 맞지 않는 인형을 만들었다.”라는 이야기를 해서, 충격을 받았어. 그때 멈춰서 고민을 했죠. “나의 인형의 색깔은 뭘까?” 그 다음에 <우주비행사> 할 때 외부 미술 감독을 모셔왔고, 그때 또 많이 배우고. 그 뒤에 다시 미술감독을 했어. 물론 대중성이 많지 않다보니 큰 수익을 이루진 못했지만.(웃음)
조현산 그런 작품들이 꽤 많지. 그런데 그게 다 연결이 되더라고. 그렇게 했던 순간들이 다 남잖아. 그렇게 엄청 고생하면서 했던 경험들, 고민들 이런 것들은 다 쌓이는 거거든. 그래서 <우주비행사>도 뭔가 아쉬운 작품이야. 정말 오랫동안 고민하고 다시 공연할 때마다 신작 만들 듯이 해서 갈아 넣었는데, 마지막까지 해결되지 않은 채로 끝난 작품이야. 하지만, 그걸 했던 창작자의 경험은 그대로 남잖아. 그게 다음 작품할 때 연결되더라고.
알다시피 <달래 이야기>가 우리에게는 특별한 작품이잖아. 2002년에 시작한 <전쟁>, <전쟁2>, <진달래 산천>, <봄이 오면>, 여기에 이어진 게 <달래 이야기>야. 이게 사실 다 연결되어 있는 거야. 다섯 개 작품들이 연출도, 형식도 다 달라. 김용범 마임이스트가 영국 유학 후 전쟁을 소재로 한 작품을 하자고 해서 시작한 작품이 <전쟁>, 그 다음 같은 소재를 인형극으로 한 것이 <전쟁2>, 그 다음 다른 친구에게 연출을 맡긴 작품이 <진달래 산천>. 이 작품은 출연진만 서른 명이야. 밥값이 장난이 아니었지.(웃음) 그런 과정을 거치고 다시 김용범 마임이스트와 <봄이 오면>을 만들었지. 그 후에 이 모든 과정을 정리해서 만든 게 <달래 이야기>지. 6,7년이 걸린 거야.
작품마다 가진 고유성이 있는 것 같아. 작품이 지켜야 될 것들과 변화해야 할 것들이 있더라. 무대예술은 보존되지 않잖아. 영화와 다르게 그 순간에만 존재하고 사라지는 거거든. 이러한 유한함이 무대예술의 매력이고 아름다움이야. 그래서 아무리 훌륭하고 재미있다는 공연도 오늘 재미있다고 해서 내일 재밌지는 않은 거잖아. 그런데 끊임없이 이게 좋다면 왜 좋은지, 그걸 내가 아주 구체적으로 알고 있어야 지킬 수 있어. 그래서 <달래 이야기>를 만드는 과정 안에서 많은 공부가 됐지. 초창기 <전쟁> 만들 때 보면 인형을 정말 메카닉하게, 다양하게 만들었어. 인형을 완전히 사람과 유사한 형태로 만들고. 그런데 생각해봐. 인형극 안에서 인형의 목적이 오로지 사람을 따라 하는 거라면, 사람이 하면 되잖아. 왜 인형을 쓸까? 물론 그 질문의 답을 찾아가는 방법은 작품마다, 장면마다 다를 수 있는 거지. 그것을 창작자가 찾아내야 하는 거지. 그래야 그 창작자마다 자기의 고유한 것이 있는 거야. 하지만 예술에 답은 없지만, 기술은 존재하는 거잖아. 내 마음대로 아무거나 다 한다고 해서 되는 건 아니잖아. 끊임없는 연습과 반복이 필요해. <달래 이야기>는 그 과정 자체에서 나에게 큰 공부가 되어준 작품이야.
류지연 아이러니한 게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 작품이 공부가 많이 돼. <몽>이라는 작품이 그래. 작가가 쓴 내용과 우리가 하고 싶은 주제는 같았는데, 작품을 만들면서 표현이 다른 것 같아서 나중에 앞부분에 스톱모션으로 표현을 했거든. 그때 작가가 자신의 대본을 훼손한 것으로 보고 소송으로 갈 뻔 했어. 우리가 너무 무지했던 것 같아요. 우리가 작품 만들 때 텍스트가 늘 아쉬운 생각이 들어 여러 작가들과 작업을 했는데 스타일이 다 다르지. <손 없는 색시> 할 때는 만드는 과정에서는 힘들었지만, 경민선 작가님과 잘 맞았던 것 같아요. 제가 작품에 대해서 질문을 하면 좋아해. 그런 질문을 해주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 그래서 더 가까워진 것도 있어요. 대답을 하면서 작가도 작품이 더 단단해져서 좋다고 이야기하는 게 좋았어.
조현산 <손 없는 색시>에서 재밌었던 부분이, 작가가 텍스트로 쓴 것을 내 나름대로 재해석하고 시각화할 수 있어서. 그래서 그때 나에게는 인형극이 ‘텍스트를 시각화한 것’이라고 느껴진 것 같아. 작가가 시적으로 쓴 대사가 의미하는 것을 나름대로 해석해서 이미지화해서 만들어 냈어. 다행히 작가도 텍스트 그대로보다, 내가 재해석한 것을 더 좋아해줘서 함께 재밌게 했어. 대사할 때 무대에서 벌어지는 시각적인 상황, 대사할 때의 리듬과 톤, 의미, 흐르는 음악 이런 것들이 전부 하나를 향해서 조화를 이루면서 달려가고 있거든. 그러면 구체적으로 말로 설명하지는 못해도 이 장면을 관객들이 느끼는 거야. 그런데 아무렇게나 하는 건 아니고, 매우 구체적으로 이유가 있어야 돼. 세계관을 설정하고 배우를 이해시키고 훈련시키고 배우가 무대에서 몸을 움직일 때 무엇을 목표로 움직이는지 찾고. 그런 과정들이었던 것 같아.
류지연 <손 없는 색시>의 원작이 민담이에요. 세계 곳곳에서 비슷한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대부분 색시가 결혼을 하고 시부모 또는 남편으로부터 학대를 받고 손이 잘리고 고행을 겪다가 우물에 아기가 빠져. 여자가 아기를 건지기 위해서 애를 쓸 때, 동양에서는 신이 손을 자라나게 하고 서양에서는 은손을 달아준다는 식으로 아기를 건지게 되어서 행복하게 잘 산다는 건데. <손 없는 색시>에서는 민담의 모티브인 손이 없는 것을 가져와서 작가가 새로 이야기를 쓴 거야. 손이 없다는 건 뭘까? 손은 욕망을 상징하는 거고, 인간은 욕망이 있어야 사는데 존재인데. 손이 없다는 건 욕망이 거세된 것. 어떤 고통스런 상황을 맞이해서 손이 떠났다는 거지. 삶의 의지를 상실한 상태로 해석한 거지. <손 없는 색시>에서는 마지막에 손을 안 붙였어요. 난 그게 공감이 돼. 상처나 이런 것들은 기억상실증에 걸리지 않는 한 사라지거나 없어지지 않는 게 현실이라 생각해서. 내 상처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에서 희망이 생긴다고 생각해서.
조현산 상처가 갑자기 없었던 일이 되는 건 아니잖아. 상처는 아물면 그대로 또 사는 거야. 하지만 노인이었던 아이가 다시 아기가 되잖아. 그게 우리의 상처를 극복하는 방식인 거지. 다시 용기를 내고 상처를 받아들인 것. 그리고 작품에서 가장 비극적인 인물은 색시가 아니라 아이거든. 태어나자마자 수의를 입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인물인데 가장 거침없고 밝은 인물이야. 슬픔과 기쁨, 생과 사는 늘 서로 등을 맞대고 있고, 그렇게 계속 순환하고 함께 살아가는 것을 보여줘. 내가 한 작품이지만 <손 없는 색시>가 좋은 내용을 담고 있고 개인적으로도 공감이 되어서 좋아하는 작품이야.
Q. 평상시에도 두 분이서 같이 작품 이야기 많이 나누시나요?
류지연 저는 외부 연출과 작업해 본 적도 있고 남편이랑도 해봤지만, 작업할 때 가장 좋은 점은 이렇게 질문을 편하게 많이 할 수 있다는 것. 물론 외부 연출에게도 질문을 하긴 하지만 편하지는 않고, 또 항상 같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사실 작업하는 과정은 아무도 몰라주는 일이잖아요. 그래도 최소 한 사람은 알아주는 사람이 있으니까. 극단 식구들이 아무리 많아도 어쨌든 집으로 돌아가잖아. 내가 작업하는 그 순간에 옆에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 혼자 작업실에서 밤새 작업을 하다보면 정말 외로워지거든요. 하지만 최소한 한 사람은 내가 어떻게 고생하는지 알아주니까.
조현산 내가 고민하는 모습을 이 사람은 항상 지켜봤지. 누구도 해결해 줄 수 없는 고민이지만, 옆에서 그저 지켜봐주는 거지. 함께 고민해주고. 완전 초창기에는 오랜 시간 신용불량자로 살아서 내 이름으로 핸드폰도 개통 못했어. 남양주에 있는 스키리조트 주차 건물 한편을 무료로 빌려서 사무실을 썼어. 전기 끊겨서 촛불 켜서 작업하고... 그때는 해야 된다는 생각으로. 그러다 거기에서도 나와야 해서 기획팀은 ‘극단 즐거운 사람들’ 사무실에 책상 놓고 생활했고. 아내는 일산에 미술하시는 분이 있어서 버스타고 하루에 여섯 시간을 왔다 갔다 하면서 1년 넘게 작품 만들고... 그러고 이틀 공연했네, 그 공연. 그게 <미로의 성>이야. 관객 50명 봤나.(웃음)
‘예술무대 산’을 같이 만든 오정석 극장장, 영미 씨, 그리고 같이 했던 배우들, 스태프들, 이 모든 사람들이 같이 버티고 만들어 준거지. 그런 수많은 사람들 덕분에 아직도 공연을 하고 있지 않나 늘 생각해. 운영 부분은 오정석 극장장 부부가 잘 운영해줘서 늘 든든하게 버티고 있었어. 이제는 시스템을 바꿀 수밖에 없지. 지금은 그동안 쌓아온 인연으로 최대한 작품 제작 스케줄을 맞추고, 또 공연 올리고, 나머지 시간은 다른 곳과 작업하는 방식으로 단원들에게도 어쩌면 더 기회가 생겼다고 해야겠지.
류지연 그때는 단원들도 있고, 지원사업을 계속해야 하니 1년에 평균 두세 개 작품을 했어요. 지원사업인 경우에는 부담도 많고, 시험 보는 것처럼 모니터링도 많이 오고, 감당해야 할 짐이 많았어요.
조현산 1년 365일 중 360일은 매일 새벽까지 일했던 것 같아. 배우들은 연습하고 퇴근하지만 우리는 계속 제작하고. 정말 주어진 대로 그 순간을 하루살이처럼 살았어. 자꾸 뭔가 해야 하니까 ‘지금 비상사태야’하고는 계속 뒤에 것들을 당겨쓴 것 같아. 20년 동안 그렇게 살았어. 얻은 것도 많았는데 잃은 것도 있지.
류지연 물론 그 균형을 맞춘다면 정말 좋은 직업이라고 생각해. 재밌었고, 좋았고, 그렇지만 어느 순간 삶의 균형이 무너지고 나의 시간이 너무 없으니 내가 선택한 삶을 사는 것 같지가 않고. 코로나 전에 몸과 정신이 심각하게 망가졌어요. 그동안 쌓였던 과로로 몸이 망가졌어. 나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없어지면서 세상 분간을 잘 할 수가 없어졌어. 안 할 수가 없으니까 내가 너무 좋아하는 일인데도, 나중에는 일하는 게 싫어질 정도였어요. 그러다가 코로나가 오면서 진짜 다 쉬게 됐죠. 그때 멘토링 프로그램과 강의를 하게 됐죠. 그 전에는 워낙 바쁘니까 누굴 가르칠 시간이 없었어요. 그렇게 누군가를 가르치면서 많은 위로를 얻었어요. 내가 몸과 맘이아플 때 주변 사람들이 다 도와주었어. 그때 내가 혼자 다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부족하면 다른 분들이 다 채워주신다는 것을 배웠지. 그리고 지금도 멘토링 했던 제자들이 많이 도와줘. 나를 안다는 것, 내가 오늘 피곤하구나, 이런 것을 인식한다는 것도 되게 중요해. 내가 나를 보호해줘야 하는데, 그런 생각을 못해. 내 상태를 알아봐주고 그럴 때는 쉬어주는 것이 필요해.
조현산 몸도 마음도 소모품이야. 마음은 눈에 안 보인다고 더 함부로 대하거든. 그런데 똑같이 상처를 받아. 마음도 잘 돌봐줘야지, 그러지 않으면 그게 그대로 남아. 그걸 외면하지 말고 돌봐줘야 해.
류지연 제일 중요한 건 자책을 하지 마. 난 자책을 많이 하는 스타일이라서 어떤 일이 생기면 내 탓을 많이 하거든. 그게 너무 힘들었어. 그런데 어느 순간 보니까 다들 잘 살고 있더라고. 이게 내 탓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된 거야. 돌이켜보면 나도 이유가 있었는데, 자책하기보다는 거리를 두고, 나라도 알아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표현 방식이 잘못된 거면, 내가 사과를 하면 되는 건데. 표현만 잘 하면 내가 원하는 것을 말하는 게 잘못된 게 아니라는 걸 알았지. 그 이후로 그게 작업에도 도움이 되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좋아지게 되고, 지금은 삶이 훨씬 더 나아졌다고 생각하게 돼. 내가 선택한 일이니까 감당하게 되고. 그리고 아주 힘든 일이 있었을 때 하나님을 만났어요. 교회에 찾아가서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기도도 하고. 신앙이라도 있어야 할 것 같았어요. 그걸 통해서 나에게 시련이 있었던 게 다 이유가 있었네, 그동안 내가 왜 그렇게 고통스러웠는지 알게 됐죠. <하얀 산>이 그런 작품이었거든요. 작품과 삶이 다 연결되어 있어. <손 없는 색시> 하면서 또 한 번 살아갈 수 있었고. 고통 속에서 성장한다는 걸 알게 됐죠.
조현산 어떻게든 지나고 나니까 세월 길다고 말하는 거지. 사실 우리는 이 순간만 사는 거잖아. 이 순간만 사니까 30년이 되든 300년이 되든 똑같아. 다만 먼저 시작했으니까, 우리가 돌아온 것을 압축해서 볼 수 있으니까, 우리가 이룬 것이 대단한 것처럼 보일 수 있지. 하지만 나 같은 경우에는 매일 하루살이같이 살았다고 생각하거든. 거창한 미래에 대한 생각 없이 그냥 하루하루 주어진 것에 열심히 살았어. 힘든 건, 내가 너무 좋아하고 사랑하는 일이라서 힘든 거야. 내가 너무 좋아하고 즐겁고 재밌어 하는 일인데 그러니까 잘하고 싶고, 그런데 난 너무 능력이 없고 그러니까 작품 만들 때마다 부끄럽고 막막하고... 그건 타인의 평가와 상관없어. 이건 내가 알잖아. 내가 내 자신이 얼마나 비루한지 아니까 부끄러운 거야. 하지만 해야 하잖아.
[예술무대 산]
2001년에 창단했다.
인형이 배우로서 무대 위에서 숨 쉴 수 있도록 생명을 불어넣고
인형극이 가지는 가능성과 인형극의 문법을 발견하고
실험하는 것을 목표로 창작하는 단체다.
인형을 매개로 한 다채로운 이야기와 시각효과의 끊임없는 진화를 통해
관객에게 즐거움, 감동, 여운을 제공하고
나아가 삶의 화두를 제시한다.
홈페이지 sanalive.co.kr
대표작
달래 이야기
그의 하루
손 없는 색시
파랑머리
우주비행사
선녀와 나무꾼
견우와 직녀
산초와 돈키호테
꼬물꼬물 무엇이 될까
로미오와 줄리엣
그 섬에 가면
상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