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구를 막 떠나는 배에
배표는 없지만 뛰어오른다
육지에 편안한 삶을 던져버리고
물과 하늘밖에 보이지 않는
수평선을 향하여 몸을 돌리고
지구는 둥글다는 믿음으로
고래 배 속에서 삶을 마칠 각오로
뱃멀미를 즐기려고 바둥거리며
시커먼 구름 세찬 바람을 친구 삼아
지구가 평평함을 실감하고
바다의 끝에서 저 깊은
우주의 나락으로 떨어질 때까지
아니 영원히 바다에서
헤맬지도 모르지만
표 좀 보여주시지요
없으면 어쩔 건데 바다에 던지려나
주머니를 뒤져
뭔가를 꺼내 보여준다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가는 선원
내가 배표가 있었나
확인하지 않으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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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한 생을 살면서 선택을 해야 하는 기로에 서 있는 경우가 많다. 아마도 거의 매일 사람들은 무엇인가 선택을 하면서 산다고 할 수 있는데, 무엇을 먹을까 같은 작은 일들은 어떤 선택을 하던 삶에 영향을 별로 미치지 않지만, 종종 선택에 따라 삶이 달라질 수 있는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상황에 이르기도 한다. 주로 시인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시인은 이렇게 결단을 내려야 하는 상황을 많이 만났었는데, 그럴 때마다, 크게 고심하거나 논리적인 판단을 하지 않고 감정적으로 결정을 내린 경우가 많았다. 결정에 가장 크게 작용한 것은 자존심이었다. 누가 봐도 명확하게 보이는 상황 하에서도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좋아 보이지 않은 길을 택한 경우가 꽤 많았다. 물론 자존심을 꺾은 경우도 있었지만 그것은 보다 큰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별생각 없이 뚜렷한 대척도 없이 잘 못 선택한 것 같은 길에서도 나름대로 잘 살아왔다고 시인은 생각한다. 물론 자존심을 버렸다면, 더 잘 살았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인정하지만, 인생은 모르는 일이라, 지금의 삶이 아마도 시인에겐 최적의 삶이 아닐까 하며 스스로 위로도 한다. 어떤 선택을 했건 자신의 선택이라 그 대가를 지불하며 사는 것이 인생이 아닌가. 그래도 이만큼 살았으면 운이 좋았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시인은 행운이라는 신비한 물건을 항상 주머니에 가지고 다니며 필요할 때마다 꺼내 보이면 무사 통과되는 그런 억세게 운 좋은 사나이라고 생각되는데, 더 큰 행운을 바라면 욕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