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서막
백제의 수도 한성의 왕궁내 조당 안에서는 열띤 회의가 이어지고 있었다.
어라하가 신하들과 정사를 논의하는 건청궁이다.
조당 안은 따뜻한 햇살이 들어오도록 남쪽을 향해 문이 나있고, 거대한 기둥들이 2층 구조를 떠받치고 있다.
양쪽으로 도열해 있는 신하들과, 어라하가 앉는 어좌는 내려다볼 수 있게 높은 단위에 있었으며,
어좌뒤에는 강한 햇볕이 반사되어 어좌를 비추고 있어, 어라하의 어좌가 더욱더 위엄 있어 보였다.
백제 제13대 어라하 '부여구'. 그의 이름이다.
키가 무척 크고, 오뚝한 코와 똑 부러진 얼굴은 강인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부여구는 조금 전까지 성내를 일반 백성의 사정을 알아보고자 암행을 다녀온 직후였다.
"신. 내신좌평 진고도. 어라하께 한 말씀 올리겠나이다."
"말하라."
"어라하께서 보위에 오르신 지 두 해째이옵니다. 이제는 이 백제의 깃발을 한 땅에 휘날려야 할 때라고 생각되옵니다."
내신좌평 진고도... 백제 8대 귀족 중에 해 씨와 진 씨가 가장 막강한 귀족 가문이다.
부여구는 어머니가 진 씨 가문 출신으로 부여구가 어라하에 오르기까지 지원을 해왔던 가문이다.
"그 옛날. 소서노 할마님께서 이 한 땅의 욱리하에 자리를 잡으셨다. 이제 나는 이 백제를... 명실상부하게 한 땅의 주인임을 만천하에 고하노라. 내신좌평"
"예. 어라하"
"군대를 먹일 군량미와 무기를 확충하라. 병관좌평"
"예. 어라하"
"중앙군 5만을 편성하고, 각 귀족들의 사병을 차출하여 직속군에 배치하라. 기한은 석 달이다. 석 달 후 마한 54국을 정벌하기 위한 출정을 할 것이다."
"예. 어라하. 어라하의 명을 받드나이다."
조정회의가 파한 후, 부여구와 위사좌평 진정은 궁 뒤쪽에 있는 후원의 연못을 걸으면서 대화를 하고 있었다.
"어라하. 정벌군 편성이 석 달이면 가능하겠는지요?
"그대는 내가 지난 1년 동안 해왔던 작업들이 무엇을 준비했었는지 알지 않느냐? 준비를 1년 동안 해왔으니, 우리 백제군은 무적이 될 것이다."
그러면서.. 물끄러미 연못 중앙의 연꽃을 바라보다가 한 가지 장면이 생각이 났다.
'거참.. 아무리 생각해도 당돌하단 말야... 싸우는 사이에 도망가버리다니... 이름이라도 물어볼걸 그랬군...'
생각을 해보니.. 여느 여염집 여식들과는 달라 보였는데..'
"어라하. 어라하께서 마한 열국을 정벌하고자 친정을 하실 때... 불손한 무리들이 준동할까 걱정됩니다..."
"불손한 무리??? 조정좌평 해구를 말하는군..."
"네. 그렇습니다.. 해 씨 가문이 어라하께서 빈자리를 탐할까 심히 걱정됩니다."
"하하. 걱정하지 말게나... 해 씨 가문도 같이 갈 테니 말이야.."
"네? 같이 가다니요?"
"의심스러운 자는 가까이 두는 것이 가장 좋은 견제 방법이다."
백제에는 8대 성씨 귀족이 있는데... 양대세력이 해 씨와 진 씨이다.
야심한 밤. 올빼미가 처연하게 울고.. 스산한 바람까지 불어오고 있다.
조정좌평 해구의 대저택의 가장 은밀한 공간에는 한창 대화가 오고 가고 있었다.
"고이 어라하이래.. 우리 선대 온조 어라하계는... 저 무도한 비류계에 의해 숨죽여 살아왔다."
"맞습니다. 부여융 전하."
부여융... 온조계의 마지막 후계자...
선대 이래로 백제에는 2개의 계보가 존재했다. 온조왕계와 비류왕계...
비류왕계는 강력한 해상왕국을 건설하고자 했고, 온조왕계는 마한 내 열국으로 존재하고자 했다.
해서 두 왕계는 백제 초기부터 치열한 왕위 다툼을 해왔고, 지금 현 부여고는 비류왕계다.
"여구가.. 군사를 일으킨다고 합니다. 군사를 이끌고 친정을 나가게 된다면... 그렇게 되면.. 이곳 한성은 무주공산입니다. 그때가 기회이옵니다."
"조정좌평 해구. 준비하라. 머지않아 저 부여구를 도륙할 날이 올 것이다."
"신. 조정좌평 해구. 주군의 명을 받드나이다."
백제 왕궁의 어라하의 집무실인 편전에서는 부여구 어라하와 내신좌평 진정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래. 준비는 잘 되고 있는가?
"네. 어라하. 군사들이 먹을 군량미 비축과 무기들은 계획대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활과 화살도 충분한 수량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군사들의 조련인데..."
"징집된 군사들은 대략 얼마인가?"
"장정들은 대략 4만이고.. 모두들 훈련을 받고 있습니다. 다만... 귀족들의 차출된 병력들이 아직 모이질 않은 터라..."
"달솔이상 관리와 귀족들에게 사병들을 차출해서 1만의 병력을 편성하고, 모두 기마병으로 편제하라."
"네. 어라하. 명을 받드나이다."
"그리고... 병사들의 편제가 끝나면.. 군을 3개로 나눌 것이다. 좌/우군 1만 5천, 중앙군 2만.. 좌/우군에게는 맡길 임무가 별도로 있으니.. 맡은 바 훈련을 게을리하질 말라."
"네. 어라하. 명을 받드나이다."
담유화의 집이다.
집 뒤편에선 연신 유화의 투덜거리는 말이 들렸다.
"아니.. 내가 이걸 왜 배워야 하는데????"
옆에 있던 동이가 난처한 듯이 말했다.
"아가씨... 어쩔 수 없잖아요. 며칠 있으면 나라에서 귀족들의 사병들을 차출해 간다잖아요. 달솔 어르신은 지금 아파서 병중이시고... 누가 인솔해요???"
"아니.. 그렇다고.. 여자인 내가... 전쟁터를 가야 한단 말이야??? 싫은데... 에휴."
"아가씨께서는... 여기 가노들의 호위를 받으실 테지만... 그래도 모르니.. 여기 옆에 계신 연오랑께서 잘 보살펴주셔야 해요..."
연우랑은 가노들의 대장이다.
"아가씨께 기본적인 검술과 궁술을 알려드리겠니다. 그래야 아가씨 목숨을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검술? 궁술???"
'어라? 난... 학교 다닐 때... 검도와 양궁을 했었지..ㅎㅎ.. 그게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은 몰랐는걸'
"좋아요. 연우랑 님. 잘 부탁드려요."
오늘부터 연오랑에게 실전 검술과 궁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중학교 때 검도와 궁술을 배웠는데... 검도는 3단에다가 양궁 선수 대표까지 했었던 터라.. 어렵지는 않았다.
다르다면... 궁술은... 각궁이라는 매우 다루기 힘든 활을 쓴다는 점이긴 하지만... 그래도 배운 가락이 있어서인지 그리 어렵지 않게 느껴지는 듯했다.
담유화의 아버지인 담고은 며칠째 끙끙 앓아누워있었다. 조정에도 병가를 내고 며칠째 나가질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라하께서 사병 차출 기한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에 근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당궁에게는 유일한 혈육이 담유화밖에 없었으며, 아내 또한 담유화를 낳다가 죽었기 때문에 애지중지할 수밖에 없으리라...
그러나, 자신 대신에 마한 정벌에 참여해야 한다는 사실로 인해 슬픔에 젖어 있었다.
"나 때문에.. 유화.. 네가 험한 전쟁터에 나가야 하는구나.. 이 일을 어이할꼬.."
진짜 아버지는 아니지만... 이 세계에 왔을 때부터 이 담유화라는 아가씨의 몸에 한유라의 영혼이 담긴 것이 뭔가 의미가 있는 건 아닐까? 진짜 아버지처럼 느껴지는 유화이다.
한참을 검술을 수련하다가 문득 유화가 연오랑에게 물었다.
"연우랑 님. 연우랑 님은 저 큰 바다를 건너서 송나라에 가 봤어요?"
"송나라 말입니까? 아가씨? 물론이죠. 달솔 어르신과 함께 송나라도 가보고.. 고구려에도 가보았습니다."
"엥?? 고구려요??? 저 북쪽에 있는 고구려요?"
"네. 고구려는... 우리 백제와는 형제와 같지요. 소서노 어라하시절에 북부여에서 나온 한 뿌리이니까요."
"소서노 어라하?? 자세히 좀 알려주세요."
"네. 소서노 어라하는.. 고구려의 추모왕의 왕후셨습니다. 하지만.. 추모왕이 동부여에서 온 유리왕자를 태자로 삼으신 것에 실망하여, 비류, 온조 왕자님들을 데리고 남하하셔서 처음에는 낙랑 옆에 대방 옛 땅에 터를 잡으셨으나... 그 땅이 너무 좁아서.. 이곳 한 땅 욱리하로 정착하셔서 나라를 키우셨습니다."
"추모왕?? 낙랑?? 대방??"
"이제.. 이 백제가 부여구 어라하 밑에서 기지개를 필 것 같습니다. 남쪽에는 아직 마한의 열국들이 남아있습니다. 그 마한의 열국들과 그 옆의 가라 열국들을 모두 정벌하여 백제의 나투기가 휘날리는 것을 보는 것이 모든 백제인들의 염원입니다."
결의에 가득 찬 얼굴이다.
"왜 전쟁을 하려 해요? 어라하께서는... 서로 사이좋게 살아가면 되잖아요."
"때로는... 전쟁이 필요한 법입니다.. 아가씨.. 열국으로 쪼개져서 서로 아웅다웅하느니... 백제의 깃발아래 모이는 것이 백성들에게도 나을 것입니다. 아가씨... 자 많이 쉬었습니다. 계속하시지요..."
부여구는 백제 선대 어라하들이 묻혀있는 왕릉원에 나와 있었다.
백제의 왕릉원은 궁성옆에 조성되어 있었으며,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적석총으로 지어졌다.
"아바님. 소자 부여구. 이제야 아바님의 말씀을 실행하고자 합니다."
잠시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부여구.
때는 11대 어라하인 비류어라하가 부여구와 함께 백제 한성과 욱리하를 내려다보이는 부아악에 올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구야.. 이 욱리하는 백제의 심장이다. 이 욱리하를 통해서 한 땅 전체를 도모할 수 있느니라. 또한 저 노쇠한 마한을 무너트려 마한 54국을 정벌하고, 가락 7국을 정벌하여 이 한 땅의 패자로 우뚝 서라. 산에 호랑이가 둘이 있을 수는 없는 법. 저 북쪽의 고구려를 정벌하거라. 그래야 소서노 할마님의 한을 풀 수 있느니라. 알겠느냐?"
"네. 아바님. 반드시 소자가 이 백제를 한 땅의 주인으로 만들겠습니다."
비류어라하는 제위에 있는 동안 귀족들에 의해 뜻을 펼치지 못했으나, 아들만큼은 큰 꿈을 꾸라고 하는 것이다.
어릴 적 비류어라하의 말이 귓가에 맴돌고 있었다.
"내 반드시 이 백제를 한 땅의 주인으로 만들겠나이다."
고구려 국내성 안학궁내에서는 고구려 태왕 사유가 중신들하고 국가의 중대사를 논의하고 있었다.
"태왕. 이제는 이 고구려가 강병을 양성했으니, 옛 조선의 잃어버린 땅을 다물 할 수 있도록 명을 내려 주시옵소서"
고구려 태왕 고사유이다. 이때 고구려는 요동반도까지 손에 넣고 요하를 경계로 북위와 패권을 다투고 있었다.
북위로 인해 남쪽 남삼한에 대해서는 신경을 거의 못쓰고 있는 형편이었다.
전쟁을 양쪽에서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 이제는 이 나의 고구려가 옛 조선의 잃어버린 고토를 다물 해야지. 암.. 막리지는 듣거라."
"예. 태왕"
"앞으로 1년의 시간을 주겠다. 요하전선을 안정화시킨 연후에 남삼한을 정벌하겠다. 특히 저 마한땅이 탐난단 말이야. 강병 5만을 개마기병으로 편제하라."
"예. 태왕. 명을 받드옵니다."
마한은 예로부터 한 땅에 진나라가 있을 때부터 삼한을 아우르는 전통적인 맹주였다.
그러나 백제가 욱리하를 중심으로 세력을 키워서 점차 남쪽으로 쪼그라들고 있었다.
처음에는 충청도 직산에 있던 목지국이 점차 백제에 밀려서 전라도 익산까지 남하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 백제가 마한땅에 왔을 때 목지국왕이 동북쪽 100여 리의 땅을 떼어주고 거수국으로 삼았으나, 이제는 그 백제가 마한을 위협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백제와 마한 열국은 웅천을 경계로 서로 대치중에 있었다.
목지국 궁성에서는 연일 회의를 하고 있었다.
"대왕. 요즘 백제가 심상치가 않습니다. 호시탐탐 남쪽으로 내려올라고 하니.. 이 일을 어찌해야 합니까??"
"끙.... 그러게 말이요. 웅천에서 계속 군사들을 조련하고 있으니... 이것 참.."
"대왕. 백제에게 사신을 보내시는 게 어떨까요? 저들의 속내를 알 수 있질 않겠습니까?"
"백제에게 사신을 말이오? 흠... 그래 한번 보내보시구려. 저들이 무슨 꿍꿍이인지.."